2016년을 갈무리하는 정기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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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총회를 하기까지 

많은 과정을 거치게 되요.

그중에서 재정결산이 제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 같습니다!


부산IVF에서 자랑할만한 일은 

'회계 감사'인 것 같아요.

어어어엄청 긴장되면서도,

하고 나면 어깨가 으쓱해지고

떳떳하고 당당해질 수 있는 회계 감사.


회계감사 전에는 먼저 이사님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이사님 중에 올해의 재정을 감사 해 주실 한 분을 선임해여


부산YWCA에서 일하고 계시는

여진경(고신대89) 이사님께서

올해까지 3년째 재정을 꼼꼼하게 살펴주셨어요

항상 월차, 반차를 쓰고 사무실을 방문하셔서 감사로 수고하시는데,

후배들의 입까지 챙기시는ㅠㅠ

정말 든든한 선배 이사님이십니다.

사무간사 출신이시라

왠지 더 의지하게 되는 여진경 이사님 :-)

사랑해요 이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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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계감사가 끝나고나면, 예결산이 말끔히 마무리가 되는데.

하나의 관문을 더 거치게 되지여.


전체 이사회를 열어서 총회전 예결산 심의를 한답니다.


이사님들의 열띤 논의와 검토를 통해 예결산이 통과되면!

이제 끝!!!

장난아니져??

고생해주시는 우리 이사님들 정말정말정말 감사합니다ㅠㅠ

사랑해요 이사님

<사진은 작년 11월 실행이사회 사진입니다>

 


이렇게 진중한 심의를 거치고 나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총회여! 오라! 겁날 것이 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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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최종 마무리 작업에 들어갑니다.

80% 완성해 두었던 총회 문건에 2016년 재정보고서를 만드는 작업을 마치고,

대의원을 구성하고,


당일에 심심한 입을 달래줄 간식거리를 미리 주문해면 끄읕!

작년에 떡을 해먹었던 적이 있었는데 너무 맛있어서 또 시켰어여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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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순서인 찬양과 말씀으로 정기총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올해는 부산IVF이사님이자, 아름다운교회를 담임하고 계시는

김성식 목사님께서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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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쉬는 시간을 가지고

정인철 이사장님의 사회로 2부순서가 시작되었습니다.

 


2016년 사역보고, 결산보고, 2017년 사역계획, 예산보고...

대의원 분들의 관심 속에 잘 마무리되었어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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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

정말 감사드립니다^^

 


2016년이

뿌듯하게 마무리 된 것 같아 기쁩니다!

2017년도 열심히 달려가겠습니다!!



첫번째,

나의 개인적 IVF사역관련 스토리텔링
혹은 기록



I
어젯밤(2016.6.10-11) 한 숨도 자지 못하면서 들었던 몇가지 생각중 하나를 실천하고자 한다. 그것은 나의 지난 30여년간의 IVF생활을 정리하는 의미도 있고 대학 전공을 역사학으로 삼았던 한 시절 史學徒로서 역사적 기록을 남기고 싶은 욕심도 있기 때문에 몇가지 나만의 기억들을 적어보려 하는 것이다. 

이 글이 이렇게 시작되지만 어떻게 진행되고 어떻게 결말이 날지는 나도 모른다.


II
“지성사회복음화,” 그리고 2006년부터는 “캠퍼스와 세상속의 하나님나라 온동”이란 가치를 갖고 있는 IVF의 전임간사로는 올해(2016년)로 25년째, 그리고 내년 2017년이 되면 해양대학교 개척을 위해 협동으로 캠퍼스간사를 시작한 1988년부터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III
해양대학교 개척이야기가 나오니 생각이 번진다. 해양대학교는 국립대학이었고 당시는 백프로 승선학과 학생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군대와 같은 곳이었다. 그곳에는 이미 “해양대학 기독학생회”라는 이름의 단체가 있었는 데 당시 학장님을 비롯한 교수들이 이 단체를 적극적으로 돕고 있었고 교수들중에 이미 이 단체 출신들이 있었으며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모임이었다. 나는 한국 기독학생회 IVF 출신으로 같은 “기독학생회”의 이름을 지닌 이들 모임과 접촉을 하려고 노력하였다. 그 노력의 일환으로 내가 어릴 때부터 다니던 모교회를 떠나 대부분 타지역 출신의 “해양대학 기독학생회” 멤버들이 다녔던 당시 개척 상황의 해양교회(당시 김영삼담임목사 역시 해양대 출신)에 출석하였고, 4학년 중심의 기독학생회 임원 및 리더그룹과 함께 IVF책을 읽고 성경공부로 교제하기 시작하였다. 제법 역동도 생기고 재미가 있었으나 한가지 사실을 나중에야 깨닫게 되었다. 이곳은 군대와 같은 곳이라 4학년 때만 재미를 누릴 수 있고 그때만 뭔가에 헌신할 수 있기 때문에 열심히 할 뿐, 다음 세대와 연결이 단절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이 4학년 그룹과의 모임 말미에야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다음 학년과의 연결을 꾀하던 중 나는 신대원 복학의 사유로 잠시 캠퍼스 사역을 떠나야 했고 그 다음 임원 리더 단과 다음 사역자가 잘 연결이 되지 않아 다시 사역을 소강상태로 몇 년 뒤 해양대학 IVF의 중흥을 기다려야 했다.


IV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기존 대학교의 “기독학생회”를 통한 개척의 시도가 이게 처음은 아니었다. 군대시절 전투경찰로 배치받은 제주도에서 나는 제주대학교 개척을 시도하였었는 데 그때도 역시 “제주대학교 기독학생회”라는 이름의 역사와 전통을 지닌 그룹과의 연결을 꾀한 적이 있었다. 


V
선배 간사이셨던 박영덕 목사님이 군대를 가게 될 때 캠퍼스 학생운동을 할 수 있는 곳과 환경으로 보내달라고 기도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대구에서 카튜사 근무를 하면서 대구지역 대학을 방문하고 마침내 부산지역까지 연결되었던 이야기를 들었왔던 나는, 원래 신대원을 마치고 군대를 가려고 하다가 실제로 1985년 신대원 1학기를 하면서 학교와 교수들에 너무나 실망한 나머지 더 이상 공부를 할 수 없겠다고 생각하고 휴학을 하고 군대 입대를 기다렸다. 기다리면서 자연스럽게 그 당시로부터 일년전 1984년 내가 4학년때 부산에서 처음으로 개척했던 캠퍼스 IVF 운동을 돕는 일에 최선을 다하였다. 휴학하자마자 제1회 부산지역 여름수련회를 가덕도에서 갖게 되었는데 나는 1호 학사(두명이 1호학사인데 81학번 동기이자 재수생이었던 철학과 강승문 형제는 바로 장신대로 가서 졸업후 대한기독교서회에서 일하다 소천하였다)로서 첫 타임키퍼를 맡게 되었다. 당시 주강사가 박영덕 간사님이었는데 아마 이 당시 나를 유심히 보시고 그 이후 틈만 있으면 나를 타임키퍼로 활용하시려고 했다(특히 신대원 아나톨레 첫 번째 수련회도 타임키퍼를 했다.). 이 당시 몇가지 생각나는 에피소드가 있다. 타임키퍼로 수련회를 들어갔는 데 찬양인도자가 매우 신령(?)했는데 알고 보니 그 전해 내가 4학년 때 이름만 적어두고 내가 리더였던 조에 배정되었으나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던 형제가 그 사이에 헌신(?)하고 찬양인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이름은 이춘태이다. 또 하나는 당시 가덕도 기도원은 배를 타고 직접 기도원으로 들어가거나 아니면 선착장에서 몇킬로를 걸어서 들어가야 했다. 그래서 날씨가 중요했는 데 수련회를 마치고 돌아가야 하는 날이 다 되어 비바람이 몰아치는 것이었다. 모두 다 수련회 은혜받느라고 열중하는 중에 나는 철수를 위해 날씨가 좋아져야 하기 때문에 홀로 일기를 위해 기도했는 데 거짓말 같이 마지막 날 아침 먼동이 틀 때 푸른 하늘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했던 기억을 아마 나 혼자만 갖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VI
아무튼 이런 과정을 통해 지속적으로 캠퍼스 사역에 대한 꿈을 키우게 되었고 막연하지만 나도 선배간사님처럼 IVF가 개척되지 않은 곳으로 군대 배치를 받고 거기서 캠퍼스 사역을 하고 싶다고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2학기가 시작되고 아직 군대영장을 받지 못한 나는 수소문 끝에 당시 신대원 교무과에서 나의 휴학처리 신병을 병무청에 통보하지 않은 관계로 아직 학생인 상태에 있다는 것을 확인했고, 결국 2학기 마저 군대에 입대하지 못한 채 학사로서 부산대학교 국문과의 전도성경공부팀을 맡아서 사역을 하다가 이듬해 1월에 입대하게 되었다. 훈련소를 부산 53사단 해운대에 배치를 받았다. 전체 병사중 나이가 두 번째로 많은지라 나이에 걸맞게 처신하느라 애썼던 기억이 있고 이 훈련기간 집중해서 자대배치를 캠퍼스 사역을 개척해야 하는 곳 그리고 할 수 있는 여건으로 보내주십사 간구하였다.


VII

자대배치를 받는 날, 부산항에서 제주행 도라지호를 타게 되었다...


to be continued, maybe...




두번째,

나의 개인적 IVF사역관련 스토리텔링
혹은 기록



VII

자대배치를 받는 날, 부산항에서 제주행 도라지호를 타게 되었다. 내 고향이자 사랑하던 이가 살고 있던 영도를 아련한 마음으로 배에서 보면서 밤배로 제주로 향했고, 그 다음날 아침 멀미를 하면서 제주항으로 들어갔다. 기도한 대로 제주도는 IVF 캠퍼스 개척이 필요한 곳이었기 때문에 나는 제주도 전경대에 자대배치 받은 것을 기도의 응답으로 여겼다.

VIII
제주도의 첫날밤을 지금도 기억한다. 우리 동기들은 그날 표선에 있는 313전경중대에 수용되었고 군번이 제일 빠른 내가 그날 첫 불침번이었다. 제주도 연병장의 모래는 검은 모래이다. 검은 모래를 밟으며 멀리 떠 있는 달을 쳐다보며 나는 기도했다. “내 기도에 응답해 주신 주님, 제주도의 캠퍼스를 주시옵소서!” 

IX
표선에서의 며칠인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적응훈련 후 모든 병력이 해안초소에 1-2명씩 배치받았다. 당시 제주도 전경은 공항이나 해안초소의 경계근무가 주된 업무였고 한 분대 9-10명이 초소에 살면서 밥지어 먹고 해안을 바라보면서 간첩이 들어오는 지 경계를 하는 역할을 했으나 실제로는 젊은 혈기방자한 남성들이 치고 박고 싸우면서 대장이 순찰오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 주 임무였다. 제일 서쪽 제1초소인 한경면의 초소에 배치받으면서 내 기도는 어떻게 응답될 것인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제일 졸병인 나는 그날부터 취사하는 법을 배워야 했고 밤에는 초소에 나가 경계근무를 서면서 고참들로부터 얼차려를 받아야 했다. 에피스도 하나는 제일 깝쭉대는 중간서열의 친구가 부산출신이었다. 그래서 부산출신인 나에게 관심을 보이면서 신병을 귀여운 듯이 취급하면서 이런 저런 질문을 했다. “너 어디가 고향이야?” “네 이경 지성근, 부산입니다.” “뭐? 부산이라고? 나도 부산이다. 너 어느 고등학교 출신이야?”  “네 해동고등학교 출신입니다.” “뭐라고? 나도 해동인데 너 몇기야?” “네 OO기입니다.” 그 이후로는 이 친구는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나보다 서너살 아래 기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일주일의 시간을 보내다가 갑자기 전출을 하게 되었다. 당시 전경대는 중대단위로 편성되었으나 제주도 전경대의 특성상 전국 유일의 전경대대가 제주도에 있었는 데 노형동에 있는 대대 본부로 전입이 된 것이다. 그리고 제주도에 들어온 지 채 한달이 안되는 신병이 대대장의 차기 당번병으로 발탁이 되었다. 이렇게 된 데는 직전 당번병의 힘이 컸다. 그는 원광대 교학대학원(우리로 말하자면 신학대학원)을 마치고 교무가 되려고 하는 분이었는 데 제대하기 직전이라 자기 후임을 찾았으나 마땅히 없다고 여기다가 신병중에 신학대학원을 재학하다 온 친구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를 자기 후임으로 선택했던 것이다. 당시 대대본부 내무반의 분위기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상당히 자율권이 보장되던 당번병 자리이기 때문에 그 자리로 가고 싶어 하던 고참들도 있었던 모양이고 해서 인수인계를 받으면서 내무반 생활을 하던 나에게는 어려움과 고초가 조금 있었다. 야간 불침번을 서러 나가면 못된 고참중 어떤 친구는 원산폭격을 시켜 놓고 “도대체 무슨 백으로 그 자리에 들어가게 되었노?”라고 했다. 그 때 나는 속으로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무슨 백이 있겠노? 하나님 백 말고...”

X
대대장실 근무는 사실상 경찰관 비서실 근무와 같아서 많은 자율권을 받았고 나만의 사무실도 생겼다. 그동안 일요일 교회에 나가는 것도 눈치를 많이 줘서 갈 수 없었는 데 본부에 와서 허락을 받고 주일 교회에 나갈 수 있었다. 노형동에서 제일 가까운 교회를 선택하여 신제주에 있는 <신동아교회>라는 개척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그 당시 김영준 목사님은 제법 개혁적인 목회를 꿈꾸는 분이셨고 그 교회에 그를 따르는 청년들이 좀 있었는데 놀랍게도 제주대학교 기독학생회 회장을 비롯한 임원들이 이 교회를 다니고 있다는 것을 첫 날 알게 되었다. 나는 그날 캠퍼스 개척사역을 위한 나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XI
1986년 봄 내 군대 생활은 이렇게 제주도에서의 캠퍼스개척사역을 위한 꿈과 기도응답으로 시작되었다. 누가 뭐라 해도 이건 나의 경험이고 고백이다. 그러나 주일밖에는 영외로 나갈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일요일 교회에 나갔을 때 제주대학교 기독학생회 친구들을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잠시 나누는 일이 전부였다. 그러나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기 위해 이들에게 한국기독학생회IVF에서 나오는 자료나 성경공부교재를 소개하면서 제주대 기독학생회가 한국기독학생회와 연결되면 좋겠다는 의사를 내비추곤 했다. 이렇게 한데는 이유가 있다. 그 때 당시 내가 들은 바로는 영국의 CICCU 혹은 나중 UCCF의 경우 단과대학이나 혹은 대학에 CU 즉 Christian Union 기독학생회 모임이 있으면 간사를 거기에 파송하는 형태로 학생운동이 진행된다고 했다. 먼저 자발적 학생모임이 있고 거기에 복음주의 학생운동 단체에서 간사를 파송해서 그 모임을 쩐체 운동과 연결시키는 형태라는 말이다. 그렇게 보면 자발적인 모임인 “제주대학교 기독학생회”가 “한국기독학생회”와 연결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이다. 아무튼 해가 바뀌면서 새로 회장이 된 형제도 역시 신동아교회 형제였다. 계속된 교제속에서 자연스럽게 분위기가 무르익고 당시 1987년 IVF전국수련회가 선교수련회로 춘천에서 6월 29일부터 열리기로 되어 있어서 나는 제주대학교 기독학생회가 이 때 그 수련회에 참석하면 좋겠다고 권면했다. 그리고 여차저차해서 당시 회장이던 김준표형제를 비롯해 3-4명이 참석을 결정했다. 

XII
그 해 여름은 다 아는 것처럼 이미 봄부터 뜨거웠다. ...


to be continued, anyway..




세번째,

나의 개인적 IVF사역관련 스토리텔링
혹은 기록



XI
그 해 여름은 다 아는 것처럼 이미 봄부터 뜨거웠다. 7년 대통령 임기 말 전두환의 대통령 간선제를 지키겠다는 4월 13일 소위 “호헌제선언”으로 시작된 87년의 흐름은 5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으로 연결되고 마침내 6월에는 직선제 쟁취를 위한 전국적인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다. 이 와중에 연대앞에서 시위하던 이한열 군의 죽음은 불위에 기름을 지피는 격이 되었다. (당시의 흐름은 http://terms.naver.com/entry.nhn… 을 참고하시라) 나는 제주도 전경이었다. 이미 이야기한 것처럼 당시 제주도 전경의 임무는 초소경계근무였고 일부 전경중대(312중대)만 가끔 있었던 제주대학교 시위현장에 투입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그해 늦봄은 완전 비상사태였다. 제주도 병력의 2/3가 육지에 파견을 나갔다. 해안초소에는 10명중 최소인원 3명만 남기고 다 광주, 부산, 서울로 파견된 것이다. 나는 대대장실 근무였기 때문에 영내에 남아 있을 수 있었으나 당시 사무실 분위기는 장난이 아니었다. 전경대에 근무하고 있던 대대장을 비롯한 기간요원들은 계급 승진을 위해 의무적으로 전경대에 근무하고 있던 민간인들이었는 데 거의 두어달을 퇴근없이 비상근무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 있었다. 내가 당시 수종들던 대대장인 김원봉씨 역시 퇴근 없이 관사에서 지내야 했기 때문에 나로서는 꼼짝 달싹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이런 사태가 벌어지기 전 이미 3월경에 나는 제주대 기독학생회 멤버들을 데리고 수련회에 참석하기 위해 6월말에 휴가를 신청해 두었다. 대대장에게도 몇 번이고 그 때 자리를 비우게 된다고 말씀드려 놓았다. 그러나 이제 모든 휴가 외출이 금지된 상황이 되었다. 시간은 다가오는 데 휴가 이야기를 꺼낼 수도 없을 뿐 더러 상황은 6월 10일을 기점으로 더욱 어려워지는 것이었다. 


XII
“지금 여기까지 캠퍼스 개척사역을 위해 인도하신 하나님, 내 기도를 들어 주셔서 이 기막힌 역사의 물꼬를 틀어 주시옵소서. 6월 29일 저는 휴가를 받아 제주대 기독학생회 친구들과 함께 서울을 경유해 춘천 전국 선교 수련회에 참석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저를 제주도에 보내셨으니 주께서 책임져 주옵소서.” 그 당시로서는 일말의 가능성도 없는 가운데 매일 드린 기도였다. 이 기도의 이면에 지금 아내인 사랑하는 자매와 만나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는 것도 말해야 겠다. 나는 첫 휴가를 나갔을 때 IVF개척을 도왔던 정기영목사님의 한마디 “사랑하는 이와 소통을 위해 하루에 한통씩 편지를 쓰는가?”라는 질문에 충격을 받고 복귀 후 하루도 거르지 않고 편지를 썼었다. 나중에는 할 말이 없어 하루에 책의 한두페이지를 번역하여 보내기까지 했다. 그 때 번역한 책이 존 화이트의 Eros Defiled 였는 데 그 원고를 자매가 다 보관하여 있어서 언젠가 정리해 책으로 내려고 했는 데 제대한 후 1년뒤 어느 출판사에서 번역하여 내어 실망한 적이 있었더라. 아무튼 이미 졸업, 학사 2년차인 자매는 전국 선교수련회에 조장으로 참여를 자원한 상태였고 그녀를 보고 싶은 마음 간절한 것은 당연한 것이지 않겠는가? 그러나 기도할 때는 자매를 보고 싶다고는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 

XIII
6월 28일 일요일이 되기까지 어떤 긍정적 기도응답의 조짐이 없었다. 심지어 비상상황이라 주일 영외로 나가는 것까지 금지된 상황이라 어렵사리 전화통화로 아무래도 내가 인솔자로 갈 수 없으니 김준표 회장이랑 제주대학교 기독학생회 멤버들이라도 가도록 적극권면 하였다. 나는 거의 포기상태로 가지 못하고 다만 이들이 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 비행기 비용을 내어 비행기를 타고(지금처럼 비행기 타는 게 쉬운 시절이 절대 아니다. 육지 나가는 것을 매우 어렵게 여기던 때다) 스스로 서울을 거쳐 춘천 수련회장으로 찾아 가겠다고 말한 것만으로도 나는 기도의 응답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수련회에 참석하는 것은 완전히 포기한 상태로 6월 29일 월요일을 맞았다. 아침부터 제주대 학생들을 부탁한다고 연락을 하고 오전 9시가 넘어가는 데 상황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10시에 중대발표가 있다는 정보가 입수된 모양이었다. 기간요원들은 뭔가 기대하는 눈치였지만 나는 그저 심드렁했고 다만 제주대 학생들이 무사히 수련회장에 도착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10시에 당시 여당의 대표였던 노태우 씨가 TV 회견을 하면서, 민주진영의 요구의 핵심인 직선제 수용을 골자로 하는 소위 6.29선언을 했던 것이다. 이 회견을 상황실에서 TV를 통해 지켜보던 모든 경찰 요원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뒤에서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나는 이내 이것이 나의 기도에 대한 역사를 움직이는 하나님의 응답이라 내심 고백했다. 모든 상황의 종료를 선언하는 역사적 선언이었기에 우리 대대장님도 엄청 기분 좋아하셨다. 너무 기분이 좋으셔서 살짝 나의 휴가건에 대해 일전에 약속하신 것을 언급했더니 대뜸 “내일 당장 출발해!”라고 하시는 것 아닌가? 결국 나는 6월 30일 이른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가서 춘천 수련회장으로 갈 수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를 몇 번이나 되새김하면서 말이다. 

XIV
선교 수련회가 정상적으로 열릴 수 있을지도 모르던 상황이었다고 들었다. 정국이 그 정도로 안개국면이었기 때문이었는데 아무튼 6.29선언으로 인해 수련회의 분위기는 고조되고 있었고 특히 필리핀 민주화 투쟁의 한 축을 담당했던 필리핀 IVCF의 Dr. Margalit 이 주강사였다는 사실도 분위기를 업그레이드 시켰던 것으로 기억한다. 수많은 대자보들과 함께 국악찬양으로 감격적인 찬양했던 기억이 있다. 무엇보다도 기억에 남는 것은 마지막 날 저녁 소망나누기의 하이라이트 개척지방 소개시간이었다. 이 때 당시 김준표 제주대기독학생회 대표와 첨석자들이 나와서 감격적인 소망나누기를 했다. 김준표 형제는 이제 제주대 기독학생회는 IVF와 연결되어 활동할 것이며 다음 수련회에는 비행기를 대절해서 오겠다고(내 기억으로는) 농담삼아 이야기하였다. 나로서는 엄청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XV
이렇게 제주대 대학 개척의 역사가 마무리 되진 못했다. 그 이후 내 기억으로는 기존의 제주대 기독학생회의 선배들이 IVF로 전환하는 것에 대한 극렬한 반대를 해서 김준표 형제를 비롯한 수련회참가자들이 낙심을 많이 했다는 것, 이듬해인 1988년 4월에 나는 제대하여 제주도를 떠났고 결국 김준표 형제는 장신신대원에 진학하여 제주도를 떠났다(김준표 형제는 장신대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으나 다시 사회학을 전공하여 제주대에서 사회학을 강의하다가 최근에는 목사직을 반납하고 세상속에서 하나님나라를 위해 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불길처럼 타오르리라 생각했던 제주도의 개척사역은 이후 몇 년간 수면 아래로 잠기게 되었으나 87년 전국수련회 때 만났던 제주 출신 IVF 학생들인 숭실대 박대훈, 울산대 오인석(87학번들로 나중 모두 전임간사가 됨)들과의 기도협력으로 계속 관심을 갖고 제주 개척을 위해 기도하였다. 결국 제주 출신 올산대 고창진형제가 졸업하고 제주도로 돌아오면서 다시금 제주도 IVF 개척 작업이 재개되었다. 제주도는 내 어머니의 고향이면서 내 장모님의 고향이기도 하다. 난 제주도에 있으면서 <순이삼촌>을 읽고 나서야 제주사람들을 조금 이해하기 시작했고 내 어머니의 삶에 조금 더 다가갈 수 있었다. 내가 처음 제주도에 자대 배치를 받은 이후로부터 지금까지 제주도와 제주도 캠퍼스 사역은 나의 깊은 내면에 심겨진 기도의 자리이다.


to be continued, some time later...

부산IVF의 기도



지난 부산 IVF 개척 30주년 기념행사때

30주년에 드리는 기도라는 제목으로

함께 기도했던 내용입니다.


이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고

우리의 소망이 되고

우리의 운동이 되고

우리의 삶이 되길 바랍니다.


기억하고 함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부산IVF개척 30주년에 드리는 기도. 





























 

지난 104일에 열린 부산 IVF 30주년 기념모임을  은혜롭게 잘 마쳤습니다~~


부산 IVF30주년 기념 모임을 다녀온 한 아베프 학생!!으로서 이 날은 너무나 기억에 남고 뜻 깊은 하루였습니다.
30
주년 기념 모임이라지만 저에게는 매주 캠퍼스에서 드리는 즐거운 큰모임 같았습니다.

두근두근 !!! 환영합니다^^


수영로 교회 엘레브를 들어온 순간부터 관문도 많았습니다.
30주년 기념사진을 찍고요~


참석 등록도 하구~
방문 일지도 쓰고요~
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아베프에 대한 감사와 소망을 포스트잇에 적는  관문까지~!!


하지만!
그관문을 다 마쳤을 때는 즐거운 축제 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시심을 하고 계시는 1%의 ivfer 분이십니다~~)


1부는  감사와 축복 을 주제로 학사님 부부, 아베프 가족과 합께 토크쇼가 열렸습니다.

학사님 부부를 통해 아베프안에서의 교제..아름다운 가정을 소망하기도 했고요~ ^^
2대 아베프 가족을 통해 아베프 3대 가족을 꿈꾸기도 하였습니다~

과거 sfc출신이였던! (but) 현 ivf 이사님과의 토크쇼도 하며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감사해요!!♥♥)



2부 사랑과 비전 이라는 주제로 이사님,학사님 , 학생 ,간사님 대표로 스피치강의를 하셨습니다.


전국 아베프 대표 간사님, 김종호 간사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우리의 손길이 필요한 곳에 쓰임 받는 아베퍼가 되자"

고 하셨습니다
. 현재 아베퍼로서  활동하고 있지만  졸업을 하고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 더 크게 동참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다짐도 하였답니다.


ps. 한분, 한분 놓치기 아까운 정말 귀한 강의 였습니다. 티스토리 홈페이지에 고화질의 30주년 영상이 있으니깐 다 보셨으면 좋겠어요!!!

 

3소망과 헌신  - 세대를 이어온 하나님 나라운동 캠퍼스와 세상속에서 계속 됩니다.

다 함께 30주년에 드리는 열가지약속을 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왕국과 소명을 서로가 손잡고 찬양하였습니다
. 세상의 콘서트에서 느끼지 못한 벅찬 감동을 느꼈습니다. 여기에 모인 나와 손잡고 있는 이 사람들 모두가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나아가고 있구나... 나 혼자 나아가는 것이 아니고 공동체로서 함께 나아가고 있구나  힘이 되었습니다.





30주년 행사는 끝이났지만 모두들 기쁨과 아쉬운 마음으로 사진도 찍으며
간식과 함께 즐거운 교제가 이어졌습니다.

 



"하나님 나라운동이 캠퍼스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후에도 학사때도 계속 이어지는 운동임을 느꼈어요
."
 

"학사님들의 기도와 헌신이 있었기에 지금의 ivf가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 IVF운동 하셨던 학사님들이 정말 많았으며 이 분들로부터 시작 되었던 IVF운동이 아직까지도 흘러가고 있다는것에 감사해요. 학사가 되어서도 하나님나랑 운동을 잘 해나가야겠어요 "




30주년 큰모임을 통해 감사와 찬양을 잊을 수도 있었고 모를 수도 있엇던 것인데 하나님께서 다시 기억하시게 함에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항상 기억하면서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살며  하나님나라운동에 지원하고 참여하며 헌신 하겠습니다.



거룩한 상상을 해봅니다
.

10
년 후 20년후 아베브 50주년 기념을 할 때 나의 자녀와 함께 이 곳에 있기

...   100주년이 되어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이 곳에 가득하기를.


-부산교대 12학번 김혜인 학생


  • 아벱퍼 2014.10.13 18:13

    아쉽게도 자리에 함께 하진 못했지만 이 글을 통해 30주년의 뜨거운 열기를 느낄 수 있었어요^__^ 참 보기 좋네용ㅎㅎㅎ부산IVF 30주년 축하합니다:-) 부산IVF을 위해 항상 기도할게요~~♥

부산IVF 30주년 기념모임이 
지난 10월 4일 수영로교회 선교관 엘레브에서 진행되었습니다.
3시간여에 걸친 큰모임

화면으로 함께 누리시죠~

1부. 감사와 축복
Program
- opening video: 축하 인사말
- MC opening
- Talk Show: 우리는 레알IVF 가족/ 1%의 IVFer를 찾아라!
- Thanks to: IVF를 세워 가는 사람들
 
 
 
2부. 사람와 비전
Program
- Story 1. 이순흠(고신대80) 이사 
- Story 2. 장명숙(부경대95) 학사
- Story 3. 류제민(경성대10) 학생
- Story 4. 손기환(부산대04) 간사
- Story 5. 김종호(한국IVF 대표) 간사

 


3부. 소망과 헌신
Program
 - 단막극/J' story
 - 우리의 소망과 비전
 - 30주년에 드리는 우리의 기도: 전선미(부산대 86) 학사
 - 30주년에 드리는 열가지 약속
 - 고백의 찬양: 왕국과 소명

 
 

 




부산지방ivf가 30주년이 되었다.



길지도 않은 시간이지만 이제 청년의 테를 벗고 완숙미 넘치는 장년의 초입에 들어섰다. 한국사회도 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부산지방회도 사회와 시류의 흐름에 따라 많은 변화도 있었고 계속 자라가고 있는 중이다.


몇 년전 한국기독학생회의 50주년 행사를 분당 할렐루야 교회서 거창하고 장엄하게 치루었다. 반세기 동안 걸어 왔던 ivf의 족적을 뒤 돌아보고 우리의 사역과 의미를 반성을 하고 앞으로 우리를 이끄실 주님을 바라보면서 한마음으로 그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매진할 것을 다짐하는 귀한 자리였다. 한국ivf와는 약 절반정도의 기간으로 부산ivf가 3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를 가지고자 한다. 부산ivf가 30년간 걸어온 우리의 걸음을 잠시 뒤돌아보고 오늘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 우리는 과연 잘 살고 있는지? 바른 방향과 의미를 가지고 나아가고 있는지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30년은 한 사람의 인생으로 볼때 이제는 완전히 성숙한 한 인간으로서 자기의 미래를 개척하고 자기와 함께하는 식구들을 책임져야 하는, 그러나 아직도 인생의 경험은 미흡한 배워야 할 것도 아직 많이 있고 경험해야 할 것도 많은, 완성된 그러나 아직은 아닌 정도의 위치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다 자랐다고 해야지만 그럼에도 아직은 뭔가가 불완전한 나이의 세대.
우리는 어쩌면 그 중간에 있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늦은 나이도 아니고 빠른 나이도 아니기에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시기이다. 우리는 한참때이다.






부산지방30주년을 맞아서 우리가 해야 하는 작업들은 무엇일까?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과거를 통해 어떤 교훈을 배울 것 인가?

그 교훈은 우리를 어디로 인도해 주고 우리의 삶의 목표는 무엇인가?

30년 뒤의 우리 운동은 어디를 향해 가고 있을 것인가?

우리의 사역은 삶인가 일인가? 우리 운동의 의미는 살아있는가?




1)과거를 돌아 봄
 

80년대 한국사회는 군부독재의 군화발아래 학원도 사회도 모두 소리내지 못할 신음속에 있었다. 한국교회는 70년대의 폭발적인 양적성장과 함게 풍요의 신학으로 몰핀을 맞고 개인적이고 내세적인 신앙과 성공을 추구하고 있었다. 세상 속에 있으면서 구별되기 보다는 세상에 동화되거나 세상과는 괴리된 신앙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엑스풀로대회와 같은 대형 종교행사는 한국내 기독교의 힘과 세력을 여실히 보여 주었고, 그에 따른 세계관은 폐쇄적이고 점점 세속화 되어 가는 세상의 물음에 답을 하지 못하는 절름발이 였다. 학생운동은 노동운동과 함께 정의를 부르짖었지만 군사독재는 정의를 모른 체 했고, 기득권의 세력은 결국 자신의 자리를 성공적으로 잘 지켜내고 대신 섹스와 스포츠와 스크린으로 대중에게 봉사했다. 한국교회는 이 기득권의 세력을 위해 기도해 주고 종교적으로 풍성한 혜택을 누린 덕분에 많이 성장했지만 세상의 물음에 대한 정직하고 적절한 해답을 내 놓지 못했다.


부산의 상황도 마찬가지로 교회내의 경직되고 고착화된 신앙의 패턴만으로는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그리스도 복음의 총체성을 설명하지 못했다. 평신도를 깨운다는 제자훈련이 몰아칠 때 부산ivf는 작지만 의미있는 걸음을 떼고 성경을 보다 깊이 있게 배울 수 있고, 세계관운동으로 젊은 지식인들의 갈증을 해소하며 그나라에 대한 소망을 이야기 하며 새로운 꿈을 꿀 수 있게 하였다.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통하여 많은 위로와 소망을 얻었고 인생의 목적과 방향을 새롭게 설정한 많은 젊은이들이 이 운동에 헌신하였다.
 





9
0년

는 X세대의 출현과 함께 좀 더 진보된 세대와 물질적 풍요와 컴퓨터의 대중적 보급으로 정보통신의 혁신적인 변화가 일어나 기존의 체계와는 또 다른 모양의 현상의 나타났다. 대한민국이 OECD에 가입하고 터트린 샴페인으로 건배도 하기전 IMF가 왔고 나라경제는 파탄직전까지 떨어지고, 덩달아 대학사회뿐 아니라 모든 방면에서 위기가 찾아 왔다. 그동안 80년대 대학생활을 보내고 졸업한 학사들이 우리 운동에 경제적으로도 많은 기여를 하게 되고 전체 멤버의 숫자도 많이 늘고 ivf라는 단체의 네임밸류도 얻었다. 많은 수의 젊은이들이 간사로 헌신하며 지방회가 비대해 짐에 따라 동서지방회로 나뉘고 개별 지방회로 독립적으로 움직이게 되었다. 결국은 다시 한 지방회로 합치게 되었지만 두 지방회의 양과 음은 분명히 존재했다.






2000년
새 밀레니엄시대를 맞아 대한민국사회는 실용적인 노선이 자리를 잡는다. 일단은 IMF를 졸업해야 했고 고용시장의 많은 변화는 대학사회에도 변화의 바람을 일으켜 대학은 진리의 상아탑이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게 되었다. 많은 젋은이들이 졸업이후를 걱정해야 하고 당장 감당하기 힘든 등록금 걱정과 그에 따른 학자금 대출은 진리와 이상을 쫓기 보다는 내일의 먹거리와 빚잔치에 더 매달리게 되었다. 학교내 모임의 장소를 내기가 더 어려워 지며 당장 모임에 시간내기가 부담스러워 지며 결국 공동체성의 약화를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되었고, 이미 졸업한 학사들이 많이 있음에도 비정규직과 취직의 어려움은 많은 이들을 의기소침에 이르게 했다. 당연히 학사배출 수에 비례하여 간사들의 페이가 정상적으로 돌아갈 줄 알았지만 아직도 간사들의 풀링율은 60~70%가 안되는 경우가 많다.
 






한국사회의 급박한 변화는 경제적인 것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보수와 진보의 극한 대립으로 정치적으로도 아직 성숙되지 못하고 이번 세월호의 침몰과 국정원의 간첩조작, 대선개입으로 인한 부정선거에서 보듯이, 감정적 아픔에는 다 같이 동조하면서도 세상의 불의와 폭정에는
  침묵의 카르텔로 일관하는 서민들은 어쩌면 방향을 잃은 세대이다. 그것은 요 몇 년간 처방된 신자유주의 정책과 돈에 쫓긴 일상들이 생각의 심줄을 끊어 버리고 비판의 근육을 녹아내리게 한 덕분이리라. 과연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살고 있는가?


 


2) 왜 30주년에 목을 매는가?


30주년 자체는 의미 없다. 그것은 그냥 시간이고 나이먹음 일 뿐이다. 김광석의 '서른즈음에' 를 그저 읊조리는 것 뿐이다. 지금의 상태를 고이 받아 들이고 그대로 40년을 받아들인다면 말이다.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 과거 우리가 어떤 인생의 목적과 목표를 찾았고 그것에 우리의 인생을 왜 헌신했는지 기본을 찾아야 한다. 출애굽세대가 가고 새로운 세대가 가나안을 밟기 전 모세가 새로이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쳤던 것 처럼 기본이 바로서야 한다. 그것들이 잘 자라고 있는지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 한다. 우리 운동은 성경공부의 스킬을 위해 모이지 않는다. 재미를 위해 모이지 않는다. 지식과 토론과 말의 유희를 위해 모이지 않는다. 이것들이 필요하지만 우리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모인다. 전도와 제자도와 선교를 위해 모인다. 캠퍼스와 세상속의 하나님나라를 전하기 위해 모인다.

 


30년 이전의 세대가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 이전도 이 땅속에는 수 많은 하나님나라의 운동이 있었다. 지금도 우리와 같은 목적을 위해 모이는 단체도 많이 있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색깔이 다를 뿐! 그러나 우리의 본질을 제대로 전수하고 있는지 우리 아버지 세대가 가진 복음주의 학생운동의 정신을 캠퍼스와 사회속에서 한 알의 밀알처럼 누룩처럼 잘 길러내고 확장시키고 있는 지 확인해야 한다. 한세대가 지나면 예전도 바뀌고 모양도 바뀌고 생각의 틀도 변형이 오게 마련이다. 그러나 변화하는 세대가운데 변하지 않는 복음을 전하는 우리의 사명과 요청이 잘 전수되고 있는지 꼭 돌아 볼 일이다.



3) 30주년을 어떻게 보낼것인가?


거창한 행사를 기획하지 않는다. 그것은 지나갈 뿐이다.

억지로 의미를 지어내지 않는다. 그것은 말장난 일 뿐이다.

스리 슬쩍 생일잔치만 하고 지나선 안된다. 지나온 세월에 대해 너무 무례하다.

거창한 광고로 우리를 기만하지 않는다.
이것은 내 생일이고 너의 일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의 일이다. 
어느날 문득 정신차리고 보니 나이 30살의 청장년이 되었다. 이제 곧 40이다.

없는 결과를 가지고 애타하거나 억지로 결과를 만들어 내지 않는다. 없는데 어쩌랴!






대신,

감사할 것이다. 오늘의 내가 있게 하심을! 보이지 않게 수고한 손길에 손을 잡아 줄것이다.

찬양할 것이다. 그 분이 아니었으면 난 아직도 진흙 밭에 있을 수 도 있다. 

생각하고 생각할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왜 내가 지금 여기에 있는지를?

들을 것이다.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지? 너는 어떻게 살것인지? 

다시 한번 더 다짐할 것이다. 또 다시 잊어버리고 잃어버리고 자빠지더라도 한순간이라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그 나라의 꿈을 이어 가고 또 알려 줄것을! 그것이 나의 정체성이요 존재이유이며 나의 의무이고 소중한 자랑거리이기에!
열심히 살아 갈 것이다. 우리는 어제처럼 내일도 열심히 살아 갈 것이다. 학생으로 학사로 간사로 삶으로서 꿈을 꾸고 맥을 이어 갈 것이다. 나의 언어에 그 분의 언어와 영광을 나타낼 것이다. 신앙은 삶으로 드러나기에! 하나님나라 운동은 주께서 다시 오시기 까지 끝나지 않을 운동이다. 우리 얼굴에 땀과 흙을 묻히며 살자. 어제까지 그래왔던 것 처럼 내일도 그렇게 살자고 다짐하고 격려하자. 그러기 위해 한 번 더 얼굴보고 격려해 주자. 우리 운동의 의미를 잊지 말자고! 만주 벌판을 달리던 독립투사처럼, 피아골 무지렁이 같았지만 인간이 인간답게 살 날을 꿈꾸고 지리산을 누비던 빨치산처럼! 우리 운동의 의미가 우리를 일으켜 세워 줄 것이다.
 



4) 어떤 모임을 만들것인가?


1. 행사의 전체 내용과 형식

2. 누가 모일 것인가? 어떻게 모일 것인가?

3. 누가 이야기 할 것인가? 무엇을 이야기 할 것인가?

4. 필요한 경비는 얼마인가? 어떻게 모을 것인가?

5. 꼭 있어야 할 내용은 무엇인가? 있으면 좋을 내용은 무엇인가?

6.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결과는 무엇인가?

7. 모임 뒤에 우리가 지향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하루의 행사로 모든 것을 얻을 수는 없다. 그러나, 하루의 행사로 다시 생각하게는 할 수 있다.
학사이던 학생이던 그 누구이던 간에 깨치고 나아 가 끝내 이루어야 할 목표를 재정비할 수 있는 하루이면 좋겠다.


 




글쓴이: 김창수학사(고신87). 
이문세를 닮은 외모에 털털한 성격으로 고성복어를 운영하고 있다.
오래전 2001년 전국리더대회에 믿음의 사람들이라는 내용으로 자갈치에서 학사로 살아가는 모습이 영상에 담기기도 했다.
두 딸과 아내와 더불어 소그룹 공동체를 잘 꾸려가고 있고,
부산IVF학사회 회장을 역임하고 부산IVF이사로도 섬기고 있다. 




 

  • 하나님나라 2014.07.18 10:24

    이사님의 글을 읽으며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부산ivf와 하나님나라를 향한 열정이 느껴지네요. 저도 함께 고민하며 힘쓰겠습니다

  • 주성석 2014.09.29 12:46

    창수형님 오랜만입니다 완숙한 장년의 신앙과 여전한 청년때의 외모를 보여주시네여

부산IVF가 올해(2014년) 서른살이 되었습니다.

10월4일(토) 오후 2시에 30주년 기념행사를 가집니다.

꼭 기억하시고 시간을 예약해두세요^^


30주년을 기념해서 부산IVF30년의 이야기를 조금씩 담아 볼까 합니다.


그런 취지에서 오래전 대학가에 실렸던 부산지방 이야기를 찾았습니다.

지금은 서울 중앙회 학원사역부에서 대학가를 담당하고 있는 엄창근(고신대)간사님이 옛날 대학가를 보던 중에 부산 소식이 있어 보내주었고, 일일이 워드를 쳐서 보내주셨습니다.


아래 대학가 사진과 함께 전문을 올립니다. 











부산 IVF, 오늘이 있기까지 

엄현주 (부산대 87 국문과 졸, 현 부산대 문헌정보 4) 

지금은 캐나다에 계십니다.

아마도 90년이나 91년 대학가에 실렸던 내용인 것 같습니다.

정확한 날자를 알아보겠습니다.


 부산지역에서 IVF운동이 시작된지 7년이란 세월이 흘러갔다. 그동안의 IVF운동을 되돌아 보면, 사람들이 움직이기에 앞서 하나님께서 먼저 이 운동을 준비하시고, 여기에 여러 사람을 보내어 훈련을 시켜 사용하시기도 했고, 어려울 때마다 도울 사람을 보내어 이 운동을 이끌어 오신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게 된다. 자 그러면 지금부터 하나님께서 부산에서 어떻게 일하여 오셨나 살펴보기로 하자. (그러나 이 글이 글쓰는 이의 제한적인 시각에 의해 주관적으로 다루어질 부분도 있음을 염두해 두길 부탁한다.)


1. IVF운동의 시작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IVF운동을 출현시키는 모태가 되었던 것은 고신대학의 SUF (Scripture Union Fellowship)모임이었다. 몇몇 학생들이 Q.T 나눔과 Study를 하기 위해 모이기 시작했고 방학에는 수련회를 열곤 했다. 이 수련회에 강사로 초빙되었던 IVF의 간사님(권영석, 박영덕)들이 이들 중 몇몇에게 학생복음화의 꿈을 심었고, 84년 1월의 겨울수련회에서 7명의 4학년 졸업반 학생들이 이 일에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혹자는 이를 일컬어 Koson Seven이라 부름) 동아대에서는 고신대 SUF와 비슷한 형태의 모임이 있었던 바, 이들 중 3사람은 동아대를 돕기 시작했다. 한편 이야기를 조금만 과거로 되돌려 놓으면, 83년 가을 같은 과에 다니는 3명과 또 1명이 공부나 같이 하려고 독서모임을 시작했다가 교회를 통해 알게 된 하민기(당시 고신 신학4)를 만나 One to One을 거쳐 Something New로 이어지는 성경공부모임이 되고 하민기 전도사가 84년 1월 SUF수련회에서 학생복음화에 헌신하기로 한 것을 계기로 3월의 ‘안드레의 밤’을 통해 연결된 사람들과 함께 IVF로 써클등록을 하게 됨으로, IVF운동의 주춧돌이 되었다. 고신대 SUF 모임의 4분이 이렇게 시작된 부산대 IVF 모임을 돕기 시작했다.



2. 84년 여름, IVF 전국수련회(경기도 광주, 충현기도원)에 두 대학의 멤버들과 몇몇 교회의 대학부 50여명이 참석함으로, IVF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IVF라는 이름을 달고는 있었지만, 당시로는 IVF가 무얼하는 단체인지 왜 해야 하는지 제대로 알고 있는 학생은 드물었다. 수련회를 통하여 운동의 필요성과 학생운동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모름지기 IVF에서의 역사는 방학 중에 더 많이 이루어지는 법인가 보다. 85년 1월 대구지역과 연합하여 제 1회 영남지역수련회(가산)가 있었고, 이어서 부산에서는 처음으로 문춘근(당시 부산대 3) 하창완(당시 부산대 3) 조현철(당시 동아대 3) 형제와 하민기 전도사가 서울에서 있었던 Bible & Life Conference)에 참석하여 훈련받고 옴으로 초기 부산지역 학생 리더쉽의 발판을 마련했다. 85년 하민기 전도사가 전임간사로 지원 사역하게 되었고, IVF는 모양을 갖추어가기 시작했다.


 85년 여름 장마 속에서 강행되었던 제 2회 영남지역 수련회는 많은 참석자들에게 잊혀질 수 없는 수련회가 되었다. 마지막 날 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와 캠퍼스를 향한 꿈을 나누는 시간은 촛불을 켜둔 채 그칠 줄 몰랐고, 다음날 새벽 바다 위로 솟아오른 찬란한 무지개는 얼마나 경이로왔던지! 이 수련회를 계기로 산업대의 이경해, 정은희(당시 3학년) 두 자매가 산업대에 IVF를 만들겠다고 헌신했고 이 일은 이루어졌다. 그해 가을부터 산업대의 모임이 생겨났다.



3. 그러나 이후의 1년 반이 부산지역 IVF에게 가장 어려움이 많았던 때였다. 같이 헌신하기로 하셨던 다른 분들은 1년만에 캠퍼스를 거의 떠나고, 하민기 간사님 혼자 이 일을 하시다가 1년만에 사임하시고 협동간사님들이 돕게 되셨는데 동아대는 지도력의 잦은 교체와 혼란으로 86년 거의 공중분해(?)되어 버렸고, 부산대의 경우 학생리더쉽도 완전히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여서 어려움이 많았지만, 캠퍼스에 대한 막중한 책임감으로 형제들이 번갈아 휴학을 하며 이일에 전념할 정도로 고군분투하여 스스로의 리더쉽을 키워나가며 자발성을 공고히 해 나갔다. 86년 1월과 7월의 영남지역(장유) 수련회를 치러 내면서 IVF의 정신은 점점 더 확고해졌다. 그리고 수시로 정보원 체포작적에 나섰다. 부산에서는 문화적으로 상당히 소외된 곳이라 다른 지역 간사님들을 모셔와서 이야기를 들어야 했고 자료를 구하는 일도 부산에서는 힘들어서 서울을 가야만 얻을 수 있었다. 87년 1월 제 1회 소그룹리더훈련에 부산에서 7명(박성헌 김정현 이춘태 / 부산대, 이정란 박현순 / 동아대, 정은희 / 경성대, 유애란 / 복음간전)이 참석했다가 서울에 남아 IV-House에서 합숙을 하며 온통 기독교서점만을 돌아다니며 책을 사가지고 낑낑대며 부산으로 내려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시기를 거치면서, 경성대(전산업대)지부가 세워졌을 뿐 아니라, 부산대학은 양적으로 많은 성장을 이루었다. 


4. 87년 강남호 간사님이 부산·울산지역을 한꺼번에 맡으셔서 부산과 울산을 오가시면서 부산지역을 돕게되자, 부산 IVF는 안정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이 해 여름 전국(춘천) 수련회에 88년 부산대 문춘근, 고신대 출신으로 군복무를 마치고 전역한 이순흠 두 분이 전임간사로 지원하여 각각 부산대와 경성, 동아대를 맡아 사역을 시작하시게 되었고 부산지역 IVF 사무실도 갖게 되었다. 88년 여름 대구·부산·울산이 연합하여 마지막으로 영남지역 수련회(양산 다람쥐 캠프장)가 개최되었다. 이때 인원이 부산지역이 250여명으로 더 이상 연합하기가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전체 참석인원: 550명) 89년부터는 부산·울산지역만 경남지역 수련회를 갖고 있는데, 동아대 지부가 다시 세워지고 개척되었고 인원도 급증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부별로 수련회에 대한 요구들도 많이 달라서 이번 90년 겨울에는 상황이 비슷한 지부끼리 따로 수련회를 가졌다. 훈련프로그램은 계속 연합을 유지하고 있다. 


5. 현재 부산에는 5개의 학교에 8개의 지부가 있으며 4대학에서 개척이 되고 있다. 

부산대(예수세상 / 복음세상), 동아대, 경성대, 부산여대, 고신 / 복음간전에 IVF가 있는데 부산대에는 의대가 지역으로 분리되어 있고, 고신대도 영도와 송도(의대)로 캠퍼스가 분리되어 활동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그리고 부산대에서 부산 교육대를, 동아대가 동의대를, 경성대가 수산대의 개척을 맡아 어느 정도 진척된 상태에 있다. 

최근 외국어대에서 학생자발적으로 시작된 모임에서 IVF에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이를 돕기위해 전담간사 두분(문춘근 / 부산, 이순흠 / 경성), 협동간사 한분(김성식 / 동아)과 전담간사보조(이구창 / 고신, 하은자 / 부산여대, 전선미 / 수산대개척, 나임숙 / 사무실)이 수고하고 계신다. 부산대 IVF-er들은 400여명에 이르고 있다. 

 부산 IVF의 성격을 특정짓는 한마디가 ‘단순과격’이었다. 부산 초창기 IVF-er들은 하나님의 꿈을 단순하게 나의 것으로 받아 들였으며 그것을 위해 과격하게 살아왔다. 이제 선배를 대신해 캠퍼스에 남겨진 IVF-er들은 지금까지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 가운데서 더 큰 꿈을 꾸며 더 과격하게 행동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게 되리라 기대한다.



캠퍼스에서 단순하게 하나님의 꿈을 받아들이고

과격하게 살아가는 후배들이 계속해서 나와서

하나님나라의 꿈을 이어가기를 소망합니다. 



91년 경남수련회 가이드북입니다.

이거 집에 소장하고 계신분들도 있겠죠??


오직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이라는 주제로

고신대학에서 수련회가 있었네요^^


그중 프로그램과 조직도

그리고 각 지부별소식이 있어 가져왔습니다.


91년 그해 여름 부산IVF의 분위기를 사알짝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와~~ 당시에 아침 저녁으로 말씀을 들었네요!!

역시 말씀을 강조했던 당시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완죤 은혜의 시간이었겠습니다.





당시 부산경남지방에 어떤 간사님들이 계셨는지

그리고 학생자봉들로는 어떤분들이 섬기셨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경성대부터해서 학교별 소식이 실려있습니다.

각 학교별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당시 IVF의 모토는 '지성사회의 복음화'였습니다.








당시 공업대와 수산대로 있었고.

부경대로 통합되면서 현재 부경대로 불리고 있습니다. 


부산대는 예수세상과 복음세상 두개의 지부로 운동을 하고 있었군요.



부산여대는 지금의 신라대이구요~~





외국어대 개척에 타지부 휴학생이나 리더들이

성경공부 소그룹을 인도하면서 개척이 시작된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1980년 말씀을 함게 나누고 싶은 대학생들이 모여 만든 모임 SUF

그냥 공동체를 잘 만들어 보았으면 하는 생각에

만나게 된 박영덕 간사(현 주은 혜교회 담임목사, 당시 영남대, 대구대 IVF간사)

그에게 전해 들은 캠퍼스 비전...


졸업을 앞둔 그들에게 도전된 꿈은 

대학졸업생이면 안정된 삶의 기반을 만들수 있는 현실을 뒤로한 채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한 7인


그렇게 시작된 

부산IVF


그 시작점에 있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