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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부산IVF/[발자취]부산IVF가 걸어온 길

지성근 간사의 IVF사역관련 스토리텔링 혹은 기록



첫번째,

나의 개인적 IVF사역관련 스토리텔링
혹은 기록



I
어젯밤(2016.6.10-11) 한 숨도 자지 못하면서 들었던 몇가지 생각중 하나를 실천하고자 한다. 그것은 나의 지난 30여년간의 IVF생활을 정리하는 의미도 있고 대학 전공을 역사학으로 삼았던 한 시절 史學徒로서 역사적 기록을 남기고 싶은 욕심도 있기 때문에 몇가지 나만의 기억들을 적어보려 하는 것이다. 

이 글이 이렇게 시작되지만 어떻게 진행되고 어떻게 결말이 날지는 나도 모른다.


II
“지성사회복음화,” 그리고 2006년부터는 “캠퍼스와 세상속의 하나님나라 온동”이란 가치를 갖고 있는 IVF의 전임간사로는 올해(2016년)로 25년째, 그리고 내년 2017년이 되면 해양대학교 개척을 위해 협동으로 캠퍼스간사를 시작한 1988년부터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III
해양대학교 개척이야기가 나오니 생각이 번진다. 해양대학교는 국립대학이었고 당시는 백프로 승선학과 학생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군대와 같은 곳이었다. 그곳에는 이미 “해양대학 기독학생회”라는 이름의 단체가 있었는 데 당시 학장님을 비롯한 교수들이 이 단체를 적극적으로 돕고 있었고 교수들중에 이미 이 단체 출신들이 있었으며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모임이었다. 나는 한국 기독학생회 IVF 출신으로 같은 “기독학생회”의 이름을 지닌 이들 모임과 접촉을 하려고 노력하였다. 그 노력의 일환으로 내가 어릴 때부터 다니던 모교회를 떠나 대부분 타지역 출신의 “해양대학 기독학생회” 멤버들이 다녔던 당시 개척 상황의 해양교회(당시 김영삼담임목사 역시 해양대 출신)에 출석하였고, 4학년 중심의 기독학생회 임원 및 리더그룹과 함께 IVF책을 읽고 성경공부로 교제하기 시작하였다. 제법 역동도 생기고 재미가 있었으나 한가지 사실을 나중에야 깨닫게 되었다. 이곳은 군대와 같은 곳이라 4학년 때만 재미를 누릴 수 있고 그때만 뭔가에 헌신할 수 있기 때문에 열심히 할 뿐, 다음 세대와 연결이 단절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이 4학년 그룹과의 모임 말미에야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다음 학년과의 연결을 꾀하던 중 나는 신대원 복학의 사유로 잠시 캠퍼스 사역을 떠나야 했고 그 다음 임원 리더 단과 다음 사역자가 잘 연결이 되지 않아 다시 사역을 소강상태로 몇 년 뒤 해양대학 IVF의 중흥을 기다려야 했다.


IV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기존 대학교의 “기독학생회”를 통한 개척의 시도가 이게 처음은 아니었다. 군대시절 전투경찰로 배치받은 제주도에서 나는 제주대학교 개척을 시도하였었는 데 그때도 역시 “제주대학교 기독학생회”라는 이름의 역사와 전통을 지닌 그룹과의 연결을 꾀한 적이 있었다. 


V
선배 간사이셨던 박영덕 목사님이 군대를 가게 될 때 캠퍼스 학생운동을 할 수 있는 곳과 환경으로 보내달라고 기도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대구에서 카튜사 근무를 하면서 대구지역 대학을 방문하고 마침내 부산지역까지 연결되었던 이야기를 들었왔던 나는, 원래 신대원을 마치고 군대를 가려고 하다가 실제로 1985년 신대원 1학기를 하면서 학교와 교수들에 너무나 실망한 나머지 더 이상 공부를 할 수 없겠다고 생각하고 휴학을 하고 군대 입대를 기다렸다. 기다리면서 자연스럽게 그 당시로부터 일년전 1984년 내가 4학년때 부산에서 처음으로 개척했던 캠퍼스 IVF 운동을 돕는 일에 최선을 다하였다. 휴학하자마자 제1회 부산지역 여름수련회를 가덕도에서 갖게 되었는데 나는 1호 학사(두명이 1호학사인데 81학번 동기이자 재수생이었던 철학과 강승문 형제는 바로 장신대로 가서 졸업후 대한기독교서회에서 일하다 소천하였다)로서 첫 타임키퍼를 맡게 되었다. 당시 주강사가 박영덕 간사님이었는데 아마 이 당시 나를 유심히 보시고 그 이후 틈만 있으면 나를 타임키퍼로 활용하시려고 했다(특히 신대원 아나톨레 첫 번째 수련회도 타임키퍼를 했다.). 이 당시 몇가지 생각나는 에피소드가 있다. 타임키퍼로 수련회를 들어갔는 데 찬양인도자가 매우 신령(?)했는데 알고 보니 그 전해 내가 4학년 때 이름만 적어두고 내가 리더였던 조에 배정되었으나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던 형제가 그 사이에 헌신(?)하고 찬양인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이름은 이춘태이다. 또 하나는 당시 가덕도 기도원은 배를 타고 직접 기도원으로 들어가거나 아니면 선착장에서 몇킬로를 걸어서 들어가야 했다. 그래서 날씨가 중요했는 데 수련회를 마치고 돌아가야 하는 날이 다 되어 비바람이 몰아치는 것이었다. 모두 다 수련회 은혜받느라고 열중하는 중에 나는 철수를 위해 날씨가 좋아져야 하기 때문에 홀로 일기를 위해 기도했는 데 거짓말 같이 마지막 날 아침 먼동이 틀 때 푸른 하늘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했던 기억을 아마 나 혼자만 갖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VI
아무튼 이런 과정을 통해 지속적으로 캠퍼스 사역에 대한 꿈을 키우게 되었고 막연하지만 나도 선배간사님처럼 IVF가 개척되지 않은 곳으로 군대 배치를 받고 거기서 캠퍼스 사역을 하고 싶다고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2학기가 시작되고 아직 군대영장을 받지 못한 나는 수소문 끝에 당시 신대원 교무과에서 나의 휴학처리 신병을 병무청에 통보하지 않은 관계로 아직 학생인 상태에 있다는 것을 확인했고, 결국 2학기 마저 군대에 입대하지 못한 채 학사로서 부산대학교 국문과의 전도성경공부팀을 맡아서 사역을 하다가 이듬해 1월에 입대하게 되었다. 훈련소를 부산 53사단 해운대에 배치를 받았다. 전체 병사중 나이가 두 번째로 많은지라 나이에 걸맞게 처신하느라 애썼던 기억이 있고 이 훈련기간 집중해서 자대배치를 캠퍼스 사역을 개척해야 하는 곳 그리고 할 수 있는 여건으로 보내주십사 간구하였다.


VII

자대배치를 받는 날, 부산항에서 제주행 도라지호를 타게 되었다...


to be continued, maybe...




두번째,

나의 개인적 IVF사역관련 스토리텔링
혹은 기록



VII

자대배치를 받는 날, 부산항에서 제주행 도라지호를 타게 되었다. 내 고향이자 사랑하던 이가 살고 있던 영도를 아련한 마음으로 배에서 보면서 밤배로 제주로 향했고, 그 다음날 아침 멀미를 하면서 제주항으로 들어갔다. 기도한 대로 제주도는 IVF 캠퍼스 개척이 필요한 곳이었기 때문에 나는 제주도 전경대에 자대배치 받은 것을 기도의 응답으로 여겼다.

VIII
제주도의 첫날밤을 지금도 기억한다. 우리 동기들은 그날 표선에 있는 313전경중대에 수용되었고 군번이 제일 빠른 내가 그날 첫 불침번이었다. 제주도 연병장의 모래는 검은 모래이다. 검은 모래를 밟으며 멀리 떠 있는 달을 쳐다보며 나는 기도했다. “내 기도에 응답해 주신 주님, 제주도의 캠퍼스를 주시옵소서!” 

IX
표선에서의 며칠인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적응훈련 후 모든 병력이 해안초소에 1-2명씩 배치받았다. 당시 제주도 전경은 공항이나 해안초소의 경계근무가 주된 업무였고 한 분대 9-10명이 초소에 살면서 밥지어 먹고 해안을 바라보면서 간첩이 들어오는 지 경계를 하는 역할을 했으나 실제로는 젊은 혈기방자한 남성들이 치고 박고 싸우면서 대장이 순찰오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 주 임무였다. 제일 서쪽 제1초소인 한경면의 초소에 배치받으면서 내 기도는 어떻게 응답될 것인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제일 졸병인 나는 그날부터 취사하는 법을 배워야 했고 밤에는 초소에 나가 경계근무를 서면서 고참들로부터 얼차려를 받아야 했다. 에피스도 하나는 제일 깝쭉대는 중간서열의 친구가 부산출신이었다. 그래서 부산출신인 나에게 관심을 보이면서 신병을 귀여운 듯이 취급하면서 이런 저런 질문을 했다. “너 어디가 고향이야?” “네 이경 지성근, 부산입니다.” “뭐? 부산이라고? 나도 부산이다. 너 어느 고등학교 출신이야?”  “네 해동고등학교 출신입니다.” “뭐라고? 나도 해동인데 너 몇기야?” “네 OO기입니다.” 그 이후로는 이 친구는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나보다 서너살 아래 기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일주일의 시간을 보내다가 갑자기 전출을 하게 되었다. 당시 전경대는 중대단위로 편성되었으나 제주도 전경대의 특성상 전국 유일의 전경대대가 제주도에 있었는 데 노형동에 있는 대대 본부로 전입이 된 것이다. 그리고 제주도에 들어온 지 채 한달이 안되는 신병이 대대장의 차기 당번병으로 발탁이 되었다. 이렇게 된 데는 직전 당번병의 힘이 컸다. 그는 원광대 교학대학원(우리로 말하자면 신학대학원)을 마치고 교무가 되려고 하는 분이었는 데 제대하기 직전이라 자기 후임을 찾았으나 마땅히 없다고 여기다가 신병중에 신학대학원을 재학하다 온 친구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를 자기 후임으로 선택했던 것이다. 당시 대대본부 내무반의 분위기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상당히 자율권이 보장되던 당번병 자리이기 때문에 그 자리로 가고 싶어 하던 고참들도 있었던 모양이고 해서 인수인계를 받으면서 내무반 생활을 하던 나에게는 어려움과 고초가 조금 있었다. 야간 불침번을 서러 나가면 못된 고참중 어떤 친구는 원산폭격을 시켜 놓고 “도대체 무슨 백으로 그 자리에 들어가게 되었노?”라고 했다. 그 때 나는 속으로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무슨 백이 있겠노? 하나님 백 말고...”

X
대대장실 근무는 사실상 경찰관 비서실 근무와 같아서 많은 자율권을 받았고 나만의 사무실도 생겼다. 그동안 일요일 교회에 나가는 것도 눈치를 많이 줘서 갈 수 없었는 데 본부에 와서 허락을 받고 주일 교회에 나갈 수 있었다. 노형동에서 제일 가까운 교회를 선택하여 신제주에 있는 <신동아교회>라는 개척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그 당시 김영준 목사님은 제법 개혁적인 목회를 꿈꾸는 분이셨고 그 교회에 그를 따르는 청년들이 좀 있었는데 놀랍게도 제주대학교 기독학생회 회장을 비롯한 임원들이 이 교회를 다니고 있다는 것을 첫 날 알게 되었다. 나는 그날 캠퍼스 개척사역을 위한 나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XI
1986년 봄 내 군대 생활은 이렇게 제주도에서의 캠퍼스개척사역을 위한 꿈과 기도응답으로 시작되었다. 누가 뭐라 해도 이건 나의 경험이고 고백이다. 그러나 주일밖에는 영외로 나갈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일요일 교회에 나갔을 때 제주대학교 기독학생회 친구들을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잠시 나누는 일이 전부였다. 그러나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기 위해 이들에게 한국기독학생회IVF에서 나오는 자료나 성경공부교재를 소개하면서 제주대 기독학생회가 한국기독학생회와 연결되면 좋겠다는 의사를 내비추곤 했다. 이렇게 한데는 이유가 있다. 그 때 당시 내가 들은 바로는 영국의 CICCU 혹은 나중 UCCF의 경우 단과대학이나 혹은 대학에 CU 즉 Christian Union 기독학생회 모임이 있으면 간사를 거기에 파송하는 형태로 학생운동이 진행된다고 했다. 먼저 자발적 학생모임이 있고 거기에 복음주의 학생운동 단체에서 간사를 파송해서 그 모임을 쩐체 운동과 연결시키는 형태라는 말이다. 그렇게 보면 자발적인 모임인 “제주대학교 기독학생회”가 “한국기독학생회”와 연결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이다. 아무튼 해가 바뀌면서 새로 회장이 된 형제도 역시 신동아교회 형제였다. 계속된 교제속에서 자연스럽게 분위기가 무르익고 당시 1987년 IVF전국수련회가 선교수련회로 춘천에서 6월 29일부터 열리기로 되어 있어서 나는 제주대학교 기독학생회가 이 때 그 수련회에 참석하면 좋겠다고 권면했다. 그리고 여차저차해서 당시 회장이던 김준표형제를 비롯해 3-4명이 참석을 결정했다. 

XII
그 해 여름은 다 아는 것처럼 이미 봄부터 뜨거웠다. ...


to be continued, anyway..




세번째,

나의 개인적 IVF사역관련 스토리텔링
혹은 기록



XI
그 해 여름은 다 아는 것처럼 이미 봄부터 뜨거웠다. 7년 대통령 임기 말 전두환의 대통령 간선제를 지키겠다는 4월 13일 소위 “호헌제선언”으로 시작된 87년의 흐름은 5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으로 연결되고 마침내 6월에는 직선제 쟁취를 위한 전국적인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다. 이 와중에 연대앞에서 시위하던 이한열 군의 죽음은 불위에 기름을 지피는 격이 되었다. (당시의 흐름은 http://terms.naver.com/entry.nhn… 을 참고하시라) 나는 제주도 전경이었다. 이미 이야기한 것처럼 당시 제주도 전경의 임무는 초소경계근무였고 일부 전경중대(312중대)만 가끔 있었던 제주대학교 시위현장에 투입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그해 늦봄은 완전 비상사태였다. 제주도 병력의 2/3가 육지에 파견을 나갔다. 해안초소에는 10명중 최소인원 3명만 남기고 다 광주, 부산, 서울로 파견된 것이다. 나는 대대장실 근무였기 때문에 영내에 남아 있을 수 있었으나 당시 사무실 분위기는 장난이 아니었다. 전경대에 근무하고 있던 대대장을 비롯한 기간요원들은 계급 승진을 위해 의무적으로 전경대에 근무하고 있던 민간인들이었는 데 거의 두어달을 퇴근없이 비상근무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 있었다. 내가 당시 수종들던 대대장인 김원봉씨 역시 퇴근 없이 관사에서 지내야 했기 때문에 나로서는 꼼짝 달싹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이런 사태가 벌어지기 전 이미 3월경에 나는 제주대 기독학생회 멤버들을 데리고 수련회에 참석하기 위해 6월말에 휴가를 신청해 두었다. 대대장에게도 몇 번이고 그 때 자리를 비우게 된다고 말씀드려 놓았다. 그러나 이제 모든 휴가 외출이 금지된 상황이 되었다. 시간은 다가오는 데 휴가 이야기를 꺼낼 수도 없을 뿐 더러 상황은 6월 10일을 기점으로 더욱 어려워지는 것이었다. 


XII
“지금 여기까지 캠퍼스 개척사역을 위해 인도하신 하나님, 내 기도를 들어 주셔서 이 기막힌 역사의 물꼬를 틀어 주시옵소서. 6월 29일 저는 휴가를 받아 제주대 기독학생회 친구들과 함께 서울을 경유해 춘천 전국 선교 수련회에 참석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저를 제주도에 보내셨으니 주께서 책임져 주옵소서.” 그 당시로서는 일말의 가능성도 없는 가운데 매일 드린 기도였다. 이 기도의 이면에 지금 아내인 사랑하는 자매와 만나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는 것도 말해야 겠다. 나는 첫 휴가를 나갔을 때 IVF개척을 도왔던 정기영목사님의 한마디 “사랑하는 이와 소통을 위해 하루에 한통씩 편지를 쓰는가?”라는 질문에 충격을 받고 복귀 후 하루도 거르지 않고 편지를 썼었다. 나중에는 할 말이 없어 하루에 책의 한두페이지를 번역하여 보내기까지 했다. 그 때 번역한 책이 존 화이트의 Eros Defiled 였는 데 그 원고를 자매가 다 보관하여 있어서 언젠가 정리해 책으로 내려고 했는 데 제대한 후 1년뒤 어느 출판사에서 번역하여 내어 실망한 적이 있었더라. 아무튼 이미 졸업, 학사 2년차인 자매는 전국 선교수련회에 조장으로 참여를 자원한 상태였고 그녀를 보고 싶은 마음 간절한 것은 당연한 것이지 않겠는가? 그러나 기도할 때는 자매를 보고 싶다고는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 

XIII
6월 28일 일요일이 되기까지 어떤 긍정적 기도응답의 조짐이 없었다. 심지어 비상상황이라 주일 영외로 나가는 것까지 금지된 상황이라 어렵사리 전화통화로 아무래도 내가 인솔자로 갈 수 없으니 김준표 회장이랑 제주대학교 기독학생회 멤버들이라도 가도록 적극권면 하였다. 나는 거의 포기상태로 가지 못하고 다만 이들이 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 비행기 비용을 내어 비행기를 타고(지금처럼 비행기 타는 게 쉬운 시절이 절대 아니다. 육지 나가는 것을 매우 어렵게 여기던 때다) 스스로 서울을 거쳐 춘천 수련회장으로 찾아 가겠다고 말한 것만으로도 나는 기도의 응답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수련회에 참석하는 것은 완전히 포기한 상태로 6월 29일 월요일을 맞았다. 아침부터 제주대 학생들을 부탁한다고 연락을 하고 오전 9시가 넘어가는 데 상황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10시에 중대발표가 있다는 정보가 입수된 모양이었다. 기간요원들은 뭔가 기대하는 눈치였지만 나는 그저 심드렁했고 다만 제주대 학생들이 무사히 수련회장에 도착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10시에 당시 여당의 대표였던 노태우 씨가 TV 회견을 하면서, 민주진영의 요구의 핵심인 직선제 수용을 골자로 하는 소위 6.29선언을 했던 것이다. 이 회견을 상황실에서 TV를 통해 지켜보던 모든 경찰 요원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뒤에서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나는 이내 이것이 나의 기도에 대한 역사를 움직이는 하나님의 응답이라 내심 고백했다. 모든 상황의 종료를 선언하는 역사적 선언이었기에 우리 대대장님도 엄청 기분 좋아하셨다. 너무 기분이 좋으셔서 살짝 나의 휴가건에 대해 일전에 약속하신 것을 언급했더니 대뜸 “내일 당장 출발해!”라고 하시는 것 아닌가? 결국 나는 6월 30일 이른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가서 춘천 수련회장으로 갈 수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를 몇 번이나 되새김하면서 말이다. 

XIV
선교 수련회가 정상적으로 열릴 수 있을지도 모르던 상황이었다고 들었다. 정국이 그 정도로 안개국면이었기 때문이었는데 아무튼 6.29선언으로 인해 수련회의 분위기는 고조되고 있었고 특히 필리핀 민주화 투쟁의 한 축을 담당했던 필리핀 IVCF의 Dr. Margalit 이 주강사였다는 사실도 분위기를 업그레이드 시켰던 것으로 기억한다. 수많은 대자보들과 함께 국악찬양으로 감격적인 찬양했던 기억이 있다. 무엇보다도 기억에 남는 것은 마지막 날 저녁 소망나누기의 하이라이트 개척지방 소개시간이었다. 이 때 당시 김준표 제주대기독학생회 대표와 첨석자들이 나와서 감격적인 소망나누기를 했다. 김준표 형제는 이제 제주대 기독학생회는 IVF와 연결되어 활동할 것이며 다음 수련회에는 비행기를 대절해서 오겠다고(내 기억으로는) 농담삼아 이야기하였다. 나로서는 엄청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XV
이렇게 제주대 대학 개척의 역사가 마무리 되진 못했다. 그 이후 내 기억으로는 기존의 제주대 기독학생회의 선배들이 IVF로 전환하는 것에 대한 극렬한 반대를 해서 김준표 형제를 비롯한 수련회참가자들이 낙심을 많이 했다는 것, 이듬해인 1988년 4월에 나는 제대하여 제주도를 떠났고 결국 김준표 형제는 장신신대원에 진학하여 제주도를 떠났다(김준표 형제는 장신대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으나 다시 사회학을 전공하여 제주대에서 사회학을 강의하다가 최근에는 목사직을 반납하고 세상속에서 하나님나라를 위해 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불길처럼 타오르리라 생각했던 제주도의 개척사역은 이후 몇 년간 수면 아래로 잠기게 되었으나 87년 전국수련회 때 만났던 제주 출신 IVF 학생들인 숭실대 박대훈, 울산대 오인석(87학번들로 나중 모두 전임간사가 됨)들과의 기도협력으로 계속 관심을 갖고 제주 개척을 위해 기도하였다. 결국 제주 출신 올산대 고창진형제가 졸업하고 제주도로 돌아오면서 다시금 제주도 IVF 개척 작업이 재개되었다. 제주도는 내 어머니의 고향이면서 내 장모님의 고향이기도 하다. 난 제주도에 있으면서 <순이삼촌>을 읽고 나서야 제주사람들을 조금 이해하기 시작했고 내 어머니의 삶에 조금 더 다가갈 수 있었다. 내가 처음 제주도에 자대 배치를 받은 이후로부터 지금까지 제주도와 제주도 캠퍼스 사역은 나의 깊은 내면에 심겨진 기도의 자리이다.


to be continued, some time la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