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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IVF영성식탁/[설교및강의2]부산IVF학사회특별강좌

부산IVF 학사회 특별강좌 "특강! 예레미야!" 둘째날_끝을 살아가는 삶



부산IVF 학사회 특별강좌
2014년 6월 6일
"특강! 예레미야!"
제목: 끝을 살아가는 삶
강사: 김근주 교수



예레미야는 끝이 임박하였다고 전하였다.
예레미야의 메시지가 당시 구약 백성들에게 굉장히 낯설었지만,
사실 끝날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인 부분의 하나이다.
특히 한국교회는 끝날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지녀왔다.
그러면 끝을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끝날을 살아가는 것인가?
무엇보다도 끝날을 살아가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는
반드시 그 날이 온다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하고 직면하는 것이다.
 

1. 예레미야의 성전 설교_7장
3절의 '이곳'이 단지 성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 혹은 유다 땅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이 각각 언급되고있다.
해야 할 일은 삶의 길을 바르게 하는 것이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이곳이 하나님의 집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2. 이웃들 가운데 정의를 행하는 삶_4:1~2
한편으로 예레미야는 끝날을 살아가는 삶의 자세를 보여준다.
그것은 놀랍게도 일상의 실천이었다.
일상에서 순종하고 말씀을 현실로 만들어 내는 일이었다.
그래서 예레미야에는 끝이 끝이 아니라는 주제가 같이 있다.

3. 시드기야의 노예해방_34장, 34:15, 34:11
모든 히브리 노예들이 자유를 누리며 살았다면,
예루살렘은 모두가 지키고 보호해야 할 공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예루살렘이 지켜진다 한들, 여전히 다른 이의 집 에서 종으로 살아야 한다면,
예루살렘은 더 이상 지킬 만한 장소이지 않다.
역설적이게도, 다윗의 후예인 왕이 다스릴 때에 예레미야는 거의 대부분 감옥에 갇혀 지내야했지만,
바벨론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과 성전이 불 타 버린 후, 그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다윗의 나라에서 한 뼘의 땅도 없던 가난한 이들은 다윗이 사라지고 바벨론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자,
경작할 땅이 부여되었다(39:10)
누구를 위한 다윗이며, 누구를 위한 성전 인가.
하나님께서 시드기야의 유다에 멸망을 이미 선포하셨지만,
시드기야의 불순종으로 그 멸망이 현실로 된다.
하나님이 정한 심판을 바꿀 수 있느냐 없느냐는 중요한 질문이 아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그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른일"을 행할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과는 상관없이 욕심에 사로잡히게 되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재앙과 심판이 그들에게 들이닥치게 되고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애굽의 바로가 그 마음을 완강하게 하니
하나님께서도 그 마음을 완강하게 하신다는 말씀의 의미일 것이다.
  

4. 에벳멜렉의 행동_38:7~13, 39:15~18
에벳멜렉의 행동에서 지독한 역설이 있다.
예레미야와 동족인 유다의 귀족들은 예레미야를 통해 선포되는 하나님 말씀에
전혀 귀기울이지 않고 예레미야를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가지만,
이방인이요 내시였던 에벳멜렉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예레미야의 목숨을 건져낸 것이다.
이러한 진전들을 그저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는 예레미야서는 독자들을
 향해
끊임없이
무엇이 하나님의 백성을 결정하는 것인지,
무엇이 이스라엘이며,
무엇이 이방인지를 숙고하도록 이끈다고 할 수 있다.
왜 예루살렘이 멸망하지 않아야 하는 것인지,
다윗의 후예가 살아 있고,
이스라엘이 외적에게 멸망하지 않으면 무엇이 좋다 는 것인지,
담담하고 무심해 보이기까지 하는 예레미야서의 전개는
독자들을 근본적인 문제제기 속으로 이끌어 들인다.
이를 읽고 있는 오늘 우리는 한국교회가 왜 망하지 않아야 하는지 또렷하게 대답 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에 예수 믿는 사람이 많아지면 뭐가 좋아진다는 것인지,
우리는 이야기할 것이 있을까?

 예루살렘성이 망하던 날,
모든 사람들이 죽임 당하거나 끌려갈 때,
바벨론 군대에게 붙 잡혔던 내시나 왕의 시종들도 죽임을 면치 못하였다(왕하 25:18-21).
그러나 하나님께 서는 죽음과 불신의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 예레미야를 살리기 위해 애썼던 구스인의 목숨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려고 애쓰신다.
"에벳멜렉"이라는 이름은 '왕의 종'을 뜻한다는 점에서, 고유명사가 아니라 직함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구스인은 시드기야 왕의 종인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왕이신 여호와의 종이었다고 할 것이다.
죽음의 시대에도 하나님의 구원은 그 받을 사람을 향하여 베풀어진다.
그러므로 까닭 없는 심판은 없고 억울한 진멸도 없다.
특히 예레미야에게 전해진 말씀에 따르면 하나 님께서는 에벳멜렉이 예레미야를 구한 행동을 가리켜
"네가 나를 믿었음이라"(39:9)고 평가하고있음을 볼 수 있다.
그는 의인 예레미야의 목숨을 구한 것이나, 하나님보시기에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보여준 행동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고 제사 드리지만, 하나님을 떠난 죄로 인해 멸망 당하는 유다, 하나님을 믿어 기도 부탁을 하지만
일상의 순종과는 거리가 먼 다윗의 후예 시드기야와 대조를 이루면서,
구스인 에벳멜렉의 일은 다시금 무엇이 믿음인지를 잔잔하고도 깊게 소리치고 있다.
믿었기에 행동한 이 인물은 예레미야서에 가득 등장하는 유력한 유대인이 아니라,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 직책의 외국인이었다.
사실, 그는 성경 전체에서 면면히 흐르고 있는 바,
천대 받으나 도리어 하나님을 확연히 증거하는 구름 같은 증인의 한 사람일 뿐이다.
여기에는 다말 같은 여인네를 비롯해서,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
창기 라합,
모압여인 룻,
헷 사람 우리야,
막달라 마리아,
수로보니게 여인,
선한 사마리아인,
로마의 백부장,
그 리 고 이 름없는 수 많은 " 죄인들 "이 서 있다 .
 

5. 그달랴 세상
 
멸망 이후 남은 자들의 삶에도 새로운 삶의 길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