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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부산IVF/[발자취]부산IVF가 걸어온 길

1990년 부산IVF는?? 역사속으로~~

부산IVF가 올해(2014년) 서른살이 되었습니다.

10월4일(토) 오후 2시에 30주년 기념행사를 가집니다.

꼭 기억하시고 시간을 예약해두세요^^


30주년을 기념해서 부산IVF30년의 이야기를 조금씩 담아 볼까 합니다.


그런 취지에서 오래전 대학가에 실렸던 부산지방 이야기를 찾았습니다.

지금은 서울 중앙회 학원사역부에서 대학가를 담당하고 있는 엄창근(고신대)간사님이 옛날 대학가를 보던 중에 부산 소식이 있어 보내주었고, 일일이 워드를 쳐서 보내주셨습니다.


아래 대학가 사진과 함께 전문을 올립니다. 











부산 IVF, 오늘이 있기까지 

엄현주 (부산대 87 국문과 졸, 현 부산대 문헌정보 4) 

지금은 캐나다에 계십니다.

아마도 90년이나 91년 대학가에 실렸던 내용인 것 같습니다.

정확한 날자를 알아보겠습니다.


 부산지역에서 IVF운동이 시작된지 7년이란 세월이 흘러갔다. 그동안의 IVF운동을 되돌아 보면, 사람들이 움직이기에 앞서 하나님께서 먼저 이 운동을 준비하시고, 여기에 여러 사람을 보내어 훈련을 시켜 사용하시기도 했고, 어려울 때마다 도울 사람을 보내어 이 운동을 이끌어 오신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게 된다. 자 그러면 지금부터 하나님께서 부산에서 어떻게 일하여 오셨나 살펴보기로 하자. (그러나 이 글이 글쓰는 이의 제한적인 시각에 의해 주관적으로 다루어질 부분도 있음을 염두해 두길 부탁한다.)


1. IVF운동의 시작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IVF운동을 출현시키는 모태가 되었던 것은 고신대학의 SUF (Scripture Union Fellowship)모임이었다. 몇몇 학생들이 Q.T 나눔과 Study를 하기 위해 모이기 시작했고 방학에는 수련회를 열곤 했다. 이 수련회에 강사로 초빙되었던 IVF의 간사님(권영석, 박영덕)들이 이들 중 몇몇에게 학생복음화의 꿈을 심었고, 84년 1월의 겨울수련회에서 7명의 4학년 졸업반 학생들이 이 일에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혹자는 이를 일컬어 Koson Seven이라 부름) 동아대에서는 고신대 SUF와 비슷한 형태의 모임이 있었던 바, 이들 중 3사람은 동아대를 돕기 시작했다. 한편 이야기를 조금만 과거로 되돌려 놓으면, 83년 가을 같은 과에 다니는 3명과 또 1명이 공부나 같이 하려고 독서모임을 시작했다가 교회를 통해 알게 된 하민기(당시 고신 신학4)를 만나 One to One을 거쳐 Something New로 이어지는 성경공부모임이 되고 하민기 전도사가 84년 1월 SUF수련회에서 학생복음화에 헌신하기로 한 것을 계기로 3월의 ‘안드레의 밤’을 통해 연결된 사람들과 함께 IVF로 써클등록을 하게 됨으로, IVF운동의 주춧돌이 되었다. 고신대 SUF 모임의 4분이 이렇게 시작된 부산대 IVF 모임을 돕기 시작했다.



2. 84년 여름, IVF 전국수련회(경기도 광주, 충현기도원)에 두 대학의 멤버들과 몇몇 교회의 대학부 50여명이 참석함으로, IVF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IVF라는 이름을 달고는 있었지만, 당시로는 IVF가 무얼하는 단체인지 왜 해야 하는지 제대로 알고 있는 학생은 드물었다. 수련회를 통하여 운동의 필요성과 학생운동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모름지기 IVF에서의 역사는 방학 중에 더 많이 이루어지는 법인가 보다. 85년 1월 대구지역과 연합하여 제 1회 영남지역수련회(가산)가 있었고, 이어서 부산에서는 처음으로 문춘근(당시 부산대 3) 하창완(당시 부산대 3) 조현철(당시 동아대 3) 형제와 하민기 전도사가 서울에서 있었던 Bible & Life Conference)에 참석하여 훈련받고 옴으로 초기 부산지역 학생 리더쉽의 발판을 마련했다. 85년 하민기 전도사가 전임간사로 지원 사역하게 되었고, IVF는 모양을 갖추어가기 시작했다.


 85년 여름 장마 속에서 강행되었던 제 2회 영남지역 수련회는 많은 참석자들에게 잊혀질 수 없는 수련회가 되었다. 마지막 날 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와 캠퍼스를 향한 꿈을 나누는 시간은 촛불을 켜둔 채 그칠 줄 몰랐고, 다음날 새벽 바다 위로 솟아오른 찬란한 무지개는 얼마나 경이로왔던지! 이 수련회를 계기로 산업대의 이경해, 정은희(당시 3학년) 두 자매가 산업대에 IVF를 만들겠다고 헌신했고 이 일은 이루어졌다. 그해 가을부터 산업대의 모임이 생겨났다.



3. 그러나 이후의 1년 반이 부산지역 IVF에게 가장 어려움이 많았던 때였다. 같이 헌신하기로 하셨던 다른 분들은 1년만에 캠퍼스를 거의 떠나고, 하민기 간사님 혼자 이 일을 하시다가 1년만에 사임하시고 협동간사님들이 돕게 되셨는데 동아대는 지도력의 잦은 교체와 혼란으로 86년 거의 공중분해(?)되어 버렸고, 부산대의 경우 학생리더쉽도 완전히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여서 어려움이 많았지만, 캠퍼스에 대한 막중한 책임감으로 형제들이 번갈아 휴학을 하며 이일에 전념할 정도로 고군분투하여 스스로의 리더쉽을 키워나가며 자발성을 공고히 해 나갔다. 86년 1월과 7월의 영남지역(장유) 수련회를 치러 내면서 IVF의 정신은 점점 더 확고해졌다. 그리고 수시로 정보원 체포작적에 나섰다. 부산에서는 문화적으로 상당히 소외된 곳이라 다른 지역 간사님들을 모셔와서 이야기를 들어야 했고 자료를 구하는 일도 부산에서는 힘들어서 서울을 가야만 얻을 수 있었다. 87년 1월 제 1회 소그룹리더훈련에 부산에서 7명(박성헌 김정현 이춘태 / 부산대, 이정란 박현순 / 동아대, 정은희 / 경성대, 유애란 / 복음간전)이 참석했다가 서울에 남아 IV-House에서 합숙을 하며 온통 기독교서점만을 돌아다니며 책을 사가지고 낑낑대며 부산으로 내려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시기를 거치면서, 경성대(전산업대)지부가 세워졌을 뿐 아니라, 부산대학은 양적으로 많은 성장을 이루었다. 


4. 87년 강남호 간사님이 부산·울산지역을 한꺼번에 맡으셔서 부산과 울산을 오가시면서 부산지역을 돕게되자, 부산 IVF는 안정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이 해 여름 전국(춘천) 수련회에 88년 부산대 문춘근, 고신대 출신으로 군복무를 마치고 전역한 이순흠 두 분이 전임간사로 지원하여 각각 부산대와 경성, 동아대를 맡아 사역을 시작하시게 되었고 부산지역 IVF 사무실도 갖게 되었다. 88년 여름 대구·부산·울산이 연합하여 마지막으로 영남지역 수련회(양산 다람쥐 캠프장)가 개최되었다. 이때 인원이 부산지역이 250여명으로 더 이상 연합하기가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전체 참석인원: 550명) 89년부터는 부산·울산지역만 경남지역 수련회를 갖고 있는데, 동아대 지부가 다시 세워지고 개척되었고 인원도 급증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부별로 수련회에 대한 요구들도 많이 달라서 이번 90년 겨울에는 상황이 비슷한 지부끼리 따로 수련회를 가졌다. 훈련프로그램은 계속 연합을 유지하고 있다. 


5. 현재 부산에는 5개의 학교에 8개의 지부가 있으며 4대학에서 개척이 되고 있다. 

부산대(예수세상 / 복음세상), 동아대, 경성대, 부산여대, 고신 / 복음간전에 IVF가 있는데 부산대에는 의대가 지역으로 분리되어 있고, 고신대도 영도와 송도(의대)로 캠퍼스가 분리되어 활동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그리고 부산대에서 부산 교육대를, 동아대가 동의대를, 경성대가 수산대의 개척을 맡아 어느 정도 진척된 상태에 있다. 

최근 외국어대에서 학생자발적으로 시작된 모임에서 IVF에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이를 돕기위해 전담간사 두분(문춘근 / 부산, 이순흠 / 경성), 협동간사 한분(김성식 / 동아)과 전담간사보조(이구창 / 고신, 하은자 / 부산여대, 전선미 / 수산대개척, 나임숙 / 사무실)이 수고하고 계신다. 부산대 IVF-er들은 400여명에 이르고 있다. 

 부산 IVF의 성격을 특정짓는 한마디가 ‘단순과격’이었다. 부산 초창기 IVF-er들은 하나님의 꿈을 단순하게 나의 것으로 받아 들였으며 그것을 위해 과격하게 살아왔다. 이제 선배를 대신해 캠퍼스에 남겨진 IVF-er들은 지금까지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 가운데서 더 큰 꿈을 꾸며 더 과격하게 행동하고 실천하는 삶을 살게 되리라 기대한다.



캠퍼스에서 단순하게 하나님의 꿈을 받아들이고

과격하게 살아가는 후배들이 계속해서 나와서

하나님나라의 꿈을 이어가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