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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IVF영성식탁/[시심묵상]하창완목사의 '맑은물소리'

<2019년 3월 26(화) 막14:10-21 큐티목소리나눔>“욕망과 배신, 주님의 사랑”

<2019년 3월 26(화) 막14:10-21 큐티목소리나눔>
“욕망과 배신, 주님의 사랑”

1. 배신자의 출현, 유월절 식사
 * 대제사장들과 정치지도자들이 예루살렘에서 펼쳐지는 예수님의 동선을 일일이 꿰고 있지는 못했을 터, 게다가 지지자들로 둘러싸여 있을 거니까... 암튼 그들은 이 시기를 피해서 예수님을 잡고자 모의하고 있었는데...
 * 일은 의외로 쉽게 풀어지게 되었죠. 바로 내부에서 배신자가 나타난 겁니다.
 * 이건 예수님을 제거할 절호의 기회인 셈. 그가 없어지고 나면 세상은 자기들 주도하에 평화를 누릴 터~~
 * 우리나라 해방정국에서 이승만이 정권을 잡는데 가장 위협적 인물 두 사람, 여운형과 김구... 둘 다 암살당함으로써(죽여 버림으로써)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버리자, 리더 잃은 지지자(군중들)이야 다루기 쉬웠고, 결국 이승만이 자기 뜻대로 집권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졌듯이...
 * 은 삼십(마태복음에 따르면)은 구약 율법에 의하면, 노예 한 명의 몸값이었습니다(출21:32). & 예수님 당시 노동자의 4개월 치 임금이었구요...

 * 한편, 예루살렘 순례객들에게 유월절(이어지는 무교절과 같이 붙어있기 때문에 걍 무교절이라고 통칭해도 된다는^^) 식사는 꼭 예루살렘 성 안에서 먹게 되어있어서, 사람들은 각자 아는 사람 연줄을 찾아서 집집마다 사람들이 꽉 들어차서 저녁식사를 합니다요.
 * 유월절 식사 자리는 또한 서로에 대한 친밀함, 신뢰가 강조되는 자리입니다. 유월절 식탁에 둘러앉는 사람들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었구요, 같이 빵을 떼고, 쓴 나물로 만든 소스에 찍어 먹는 그 자리의 의미 역시 가장 친밀함을 누리는 공동체라는 의미였죠.
 * 예수님도 아는 연줄을 찾아서(예수님 지지자 중 한 명이었겠죠? 게다가 넓은 다락방을 가지고 있었으니 꽤 부자였을 거구요^^) 식사를 준비했고 -보통, 식사 준비는 제사장에게 가서 우리에게 필요한 양을 잡아달라고 부탁하고, 잡은 양을 가져와서 요리하고, 해 떨어지는 시각인 오후6시쯤 같이 둘러 앉아(비스듬히 누워) 같이 빵을 떼고, 같이 그릇에 손을 넣어(소스에 빵을 찍어) 먹는 거죠.

2. 유다의 욕망과 배신
 ① 욕망
 *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왜 그가 예수님을 배반했는지에 대해 정확한 이유를 아는 사람도 역시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추측할 뿐...
 * 열두 제자 가운데 그가 혼자 갈릴리출신이 아니라는 점이 뭔가 작용했을까? 베드로처럼 그도 열심당원 출신이었기에 혁명적 예수를 꿈꾸다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메시지에 충격 받아서? 회계업무를 맡고 있었는데, 심각한 회계부정을 저지른 게 들통 날 상황이라서? 야고보와 요한처럼 새로운 세상에서 한 자리 차지하려다 잘 안될 것 같아서?
 * 구체적 이유는 마지막 날 주님 앞에서 들을 수 있겠죠?^^ 지금이야 뭐 대략 짐작하거나 상상하는 수밖에...
 * 중요한 건, 유다가 내면에 뭔가 꿈틀거리며 일어난 배신의 기운, 그 생각을 행동화 한 거죠...
 * 바로 내가 생각하고 내가 바라보는 세계, 미래, 계획, 뭐 이런 거... 바로 내 속에 있는 내 욕망이, 아낌없이 다른 이를 위해 나를 내어주려는 예수님의 세계관과 충돌하게 된 거라는 것은 분명해보입니다.
 * 그리고 그 충돌의 결과, 예수님을 버리기로 결심하고 행동한 거죠.
 * vs. 베드로 : 그 역시 예수님과 자주 충돌하였지만, 결국은 예수님 앞에서 자신을 내려놓고 바꾸고 순종했다는...


  ② 악의 유혹
 * 한편, 그는 예수님이 이끈 열두 제자 공동체 안에서 신뢰받고 있는 인물이었다는 사실. 예수님이 “너희 중 한 명이 나를 팔 거다.” 얘기 하셨을 때, 모두가 다 “바로 유다, 너지?”라고 지목하지 않았다는 것. 그만큼 신뢰하고 있었던 공동체, 식구, 친구, 동지였다는 것!!
 * 이런 유다의 배신은 꾸준히 확신을 갖고 준비해온 것 같지는 않습니다. 미묘하고 복잡하고 혼동 가운데 찾아오는 유혹 앞에 점점 빠져 들어간 것 같습니다. “설마 난 아니지요?”라고 질문할 만큼 스스로도 자기가 뭔 짓을 하는지 정확하게 알지도 못한 채 리더를 배신하게 되는 그 부조리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데...
 * 원래 악은 이렇게 은밀하게 혼동가운데 우리에게 침투하고, 이용하고, 위협하는 거라는 사실!! 그래서 위험한 거라는...ㅠㅠ
 * 내 속에도 악은 언제나 이런 위협과 유혹의 손길을 뻗쳐 올 거고, (실은 예수님에게도 은밀하게 다가와 유혹한 게 악이니까...)
 * 결국,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여 주소서.”라고 기도하고 깨어있는 수밖에 없다는 거죠...

3. 담담하신 예수님. 끝까지 유다에게 기회를 주시는데...
 * 사실, 이 장면에서 제일 이해가 안 되는 건 예수님의 태도입니다.
 * 가롯 유다의 배신을 알고서 충분히 강제적으로 막을 수도 있었을 텐데...
 * 예수님은 당신 자신의 죽음을 이미 예견하셨고, 준비해오셨기에 그러질 않으신 거죠. 그가 아니면 또 다른 누군가가 했을 구체적 프로세스에 대해 마음을 비우시고 계셨던 거라는...ㅠㅠ
 * 그럼, 왜 예수님은 이 자리에서 아주 구체적이지만, 공개적 지명을 하지 않은 채 이 말씀을 하신 걸까요?
 * 이 장면에서 우리는 가롯 유다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고, 부드럽게 책망하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 “난 네가 그 일을 하지 않길 바래. 나와 함께 이 대접에 손을 같이 넣고 있지 않니? 넌 이렇게 우리와 하나란다... 실은 난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 길을 가는 거야. 하지만 넌 어떠니? 네가 그 일을 하고나면, 넌 차라리 태어나질 말았으면 하고 네 자신을 영원히 후회하게 될 거잖아?”
 * “설마 저는 아니지요?”라고 묻는 그의 말이 의미하듯, 아직도 스스로의 행동에 대해 그게 구체적으로 뭘 의미하는 지 제대로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일을 저지르고 있는 유다에게 예수님은 그가 스스로의 인격적 결단과 결심으로 돌이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신 거죠...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요13:1)
 * 이 사랑이 가슴에 먹먹하게 다가옵니다. 배신의 생각을 행동화하고 있는 그를 향한 예수님의 이 사랑이....

 *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하지만, 이 “나의 죄”는 피상적이거나 추상적인, 관념적인 차원에서의 죄가 아닌 거죠. 가롯유다처럼 가장 구체적으로 예수님을 배신하고, 우리를 지으시고 사랑하시고 파트너로 인정하고 계신 하나님에게 배신을 때리는, 내가 추구하고, 좋아하는 우리 삶 속에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행동이 바로 “나의 죄”의 실체라는 것!! 그러면서도 “설마 난 아니죠?”라고 물으며 스스로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끔찍한 상황일 수도 있는...ㅠㅠ 이게 바로 우리 죄의 실상이라는 게 몸서리치는 일인 거죠...ㅠㅠ
 * 이 배신의 행동을 껴안으시고 그 값을 지불하셨고, 지금 내 앞에서 “넌 거기에서 돌이켜야하지 않겠니?”라고 도전하시는 질문 앞에 오늘 아침 내가 서 있다는.....
 * 유다처럼 끝까지 가지는 말아야죠!! 비록 실수하고 실패하고 혼동가운데 빠지더라도, 베드로처럼 정신 차리고 돌아설 수 있는 길을 걷게 하옵소서. 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