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9월26일(목) 롬7:1-25 큐티목소리나눔>
“율법의 한계, 죄와 싸우는 자의 절규, 하나님의 해결책”
*** 바울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해서 죽고 살아남으로써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었고, 하나님의 종이 되어 그를 닮아 거룩하고 의롭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힘주어 강조했습니다.
* 하지만 바울은 여전히 유대인들이 마음에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율법을 부여잡고 살고 있고, 심지어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 속에서도 율법을 여전히 지켜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고... 그래서 율법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율법과 그리스도예수는 어떻게 관련이 있고, 또 다른지를 말합니다. 가상의 한 사람(혹은 가장 일반적이고, 누구나 포함될 수 있는)이 겪고 있는 아주 구체적이고 심층적인 고민의 현장을 보여줌으로써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 비록 바울은 유대인과 그들이 받은 율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 본문에 등장하는 ‘나’를 도덕규범을 잘 지키고 착하게 살려는 평범한 사람, 도덕군자, 성인 등으로 확장해서 봐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2장에서 말하길, 율법이 없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양심이 율법의 역할을 한다고 했으니까요^^
* 아무튼 아주 중요한 본문이라, 간단하고 쉽게 요약해보겠습니다요~~^^
1. 혼인관계를 비유로 들어보면(v1-6)
* 율법을 아는 사람들이여, 그대들에게 율법이 지배력을 발휘한다는 것쯤은 잘 아실 테고, 그대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앞서 6장에서 말한 바처럼, 예수그리스도와 연합해서 같이 죽었다는 것을 기억하시오.
* 그럼, 율법에 대해 죽었다는 말인데.. 그 말인즉, 더 이상 율법의 지배력 아래 놓여있지 않다는 말이 된단 말씀. 누가 결혼했다가 한쪽이 죽으면 이젠 더 이상 결혼의 속박에 매일 필요가 없어지는 것처럼 말예요,
* 그래서 여러분은 율법이 말하는 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이 걸 잘 지키면 복 받고, 한 치라도 어기면 저주에 저주를 받을 것이다’(신28장)는 것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졌다는 거죠.
* 그동안 밝혀진 바에 따르면(3:30), 율법은 주로 사람이 실패하는 현장에 나타나 그를 정죄하고 고발하는 역할(경찰 역할)을 해왔으니까, 이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림으로써 이 율법의 정죄로부터도 벗어나게 되었다는 말씀.^^
2. 그럼, 율법은 나쁜 녀석? 아니라니까 자꾸 그러네!(v7-12)
* 그러고 보니까, 율법 참 나쁜 역할을 했네요. ‘그놈 참 나쁘다.’라는 생각이 들지 모르겠으나, 그게 아니라구요.
*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이유는 “나를 존중하고 사랑하고 살면, 이 모든 것은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행동들이야.”라는 건데, 그 율법이 나쁠 리가 없죠.
* 근데 막상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율법을 시행해보니, 엉뚱한 결과가 나온 겁니다.
*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근본 사랑하지 않으니, 그 율법을 제대로 따를 수 없는 게 필연적인 거죠.
* 한편, 이스라엘 중에 정말 순전한 마음으로 율법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이 있어도, 또 다른 요소가 작동해서 그를 매번 실패하도록 만들어버리는데요.. 그게 바로 ‘죄의 유혹’이라는 겁니다.
* 본문에서 ‘죄’는 마치 인격을 가진 존재처럼 묘사되고 있습니다. 사탄이라고 봐도 무방 할 것 같아요.
* 이 죄라는 녀석이 우리들 마음속에 슬그머니 들어와서 자기가 내 진짜 마음인 것처럼 나에개 착각을 일으킨단 말이죠., 내 진짜 마음이 하나님을 따르고자함에도 불구하고, 나를 유혹해서 자기가 진짜라고 우리고, 나를 자기 욕망대로 끌고 간단 말예요. 왜, 엄마들이 마음속에 까만 마음, 하얀 마음이 있다고 아이들에게 이야기하잖아요?
* 근데 더 중요한 건, 이게 자기인 것처럼 생각과 느낌과 욕망을 불러일으켜놓고서, 막상 유혹에 넘어가 실패하고 나면, 그 다음엔 율법이 등장해서 나를 정죄하기 시작한다구요. 율법의 경찰 기능이 참, 이럴 때 힘을 발휘해서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마네요...ㅠㅠ
* 한편, 죄가 우리를 유혹하는 과정에 율법을 교묘하게 이용하기도 하는데요(바울이 이 점을 밝힌 건 대단한 묵상 능력이라는 생각이 듭니다요^^), 어떤 금지명령이 주어지면, 이상하게 울 마음에는 그걸 꼭 어기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죄는 이걸 또 교묘하게 이용하죠. 하와가 금지명령이 있었기에 더욱 유혹을 받은 것처럼 말예요.(이걸 좀 유식한 말로 하면, ‘반(反)제안성, contra-suggestibility : 어떠한 지시에도 부정적인 반응을 하고자 하는 성향’이라고 합니다.)
* 아무튼, 이 모든 과정에서 율법은 경찰기능을 하지만, 그렇다고 율법자체가 우리를 꼬드긴 게 아니니까,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선 한 게 맞습니다.
3. 죄와 내가 벌이는 내적 전투 현장, 결국은 죄의 포로로 잡혀가고 마는데...(v14-25)
* 아니, 율법이 선하다면, 우리가 율법을 따라 살면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거룩’을 이룰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 대답은, 아니올시다. 죄라는 놈이 있어서 율법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실제로 율법은 죄를 드러내 보여줌으로써 우리보고 그 죄를 처리하라고 미루는 것 같은데, 우리가 죄를 처리할 수 있을까요?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자.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한 번 봅시다.
* 이제 본격적으로 죄가 내 속에 들어와 벌어지는 일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 나는 율법을 따라 선한 것을 하고자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 하지만 내 속에 죄가 스며드는데요. 이 놈은 위에서도 말한 것처럼, 나를 가장해서 들어온다구요. 그래서 마치 내 속에서 두 마음이 싸우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나는 둘 다 내 마음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한 놈은 내 마음이 아니라 나를 가장한 죄인 거죠. 완전 위장한 게릴라입니다.
* 결국 나는 그에게 패하여 그를 따르고 맙니다. 더 엄밀히 말하면, 죄의 포로가 되어 죄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거죠.
* 율법을 알면 알수록, 이런 일은 계속 반복되고, 결국 나는 고통 속에서 부르짖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아!! 난 정말 비참하다. 누가 나를 이 갈등 상황 속에서 건져 줄 사람 없소?”
*** 여기까지가 선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 이상씩 경험하게 되는 내적 갈등과 절망을 정확하게 드러내 보여줍니다. 특히나 ‘율법’이라는 선의 기준을 갖고 살아가는 이스라엘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이런 절망감에 빠져들게 되는 거죠. 율법이 죄를 더욱 죄로 각인시켜주니까요(3:19).
* 바울은 이 상황에서 완전 분위기 반전, 새로운 이야기를 합니다.
* 이 절망감으로부터 벗아날 유일한 길은 바울이 만난 바,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으니까요.
4.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v25).
* 바울처럼 예수님을 만난 사람, 그를 통해, 그와 연합하여 죄에 대해 죽고, 하나님에 대해 다시 살아남을 경험한 사람은 이런 내적 갈등으로부터 나를 건져주신 하나님께 절로 감사와 찬송이 나오지 않을 수 없지 않을까요?
* 유진 피터슨의 The Message 번역을 한 번 볼까요? v24,25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해보았지만, 결국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나는 벼랑 끝에 서 있습니다. 이런 나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줄 수 있는 이 누구 없습니까? (정말 던져야 하는 질문은 바로 이런 것 아닙니까?) 감사하게도 답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같은 일을 하실 수 있고, 또 하신다는 겁니다. 마음과 생각으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싶어하지만, 죄의 세력에 끌려 전혀 엉뚱한 일을 행하는 우리의 모순 가득한 삶 속에 들어오셔서, 그분은 모든 것을 바로 세우는 일을 행하셨습니다.” 아멘!!
<주의> 바울이 말한 이 죄 아래 포로로 잡혀간 사람의 부르짖음은 지금 그리스도인인 나의 고민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나는 이미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그 옛 자아, 고통 속에서 부르짖는 그 옛 자아를 못 박아 버린 사람입니다. 예수와 함께 다시 살아서 성령과 동행하는 사람입니다.
* 지금 나 자신을 두고서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하지만 육신이 연약해서 죄의 법을 따르는” 고통 속에 있다고 착각하면 안 됩니다.
*** 하지만, 그렇다고 죄가 우리를 유혹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죄(사탄)은 예수님도 유혹했으니까요. 우리는 날마다 죄의 유혹 앞에 서지만, 과거 예수님을 모르던 시절처럼 그렇게 판판이 깨지고 신음하고 그러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승리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 그라나, 우리 자신이 죄와 싸워 이길 수 있을 거라는 착각을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 죄와 맞서 싸우는 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능력이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걸 명심히야 합니다.
* 그래서 주께서 가르쳐주신 기도 속에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라는 간절한 청원이 들어있는 겁니다.
* 죄와 맞서 싸우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완전군장을 갖추지 않을 수 없는 거구요. 하나님이 주시는 무기인 진리, 정의, 평화의 복음, 믿음, 구원, 말씀으로 무장하고 기도로 싸워나가는 것.(엡6:10-18)
* 이 모든 전투에서 능히 승리하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며 오늘도 그와 함께 전쟁터로 고고씽~^^
“율법의 한계, 죄와 싸우는 자의 절규, 하나님의 해결책”
*** 바울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해서 죽고 살아남으로써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었고, 하나님의 종이 되어 그를 닮아 거룩하고 의롭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힘주어 강조했습니다.
* 하지만 바울은 여전히 유대인들이 마음에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율법을 부여잡고 살고 있고, 심지어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 속에서도 율법을 여전히 지켜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고... 그래서 율법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율법과 그리스도예수는 어떻게 관련이 있고, 또 다른지를 말합니다. 가상의 한 사람(혹은 가장 일반적이고, 누구나 포함될 수 있는)이 겪고 있는 아주 구체적이고 심층적인 고민의 현장을 보여줌으로써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 비록 바울은 유대인과 그들이 받은 율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 본문에 등장하는 ‘나’를 도덕규범을 잘 지키고 착하게 살려는 평범한 사람, 도덕군자, 성인 등으로 확장해서 봐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2장에서 말하길, 율법이 없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양심이 율법의 역할을 한다고 했으니까요^^
* 아무튼 아주 중요한 본문이라, 간단하고 쉽게 요약해보겠습니다요~~^^
1. 혼인관계를 비유로 들어보면(v1-6)
* 율법을 아는 사람들이여, 그대들에게 율법이 지배력을 발휘한다는 것쯤은 잘 아실 테고, 그대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앞서 6장에서 말한 바처럼, 예수그리스도와 연합해서 같이 죽었다는 것을 기억하시오.
* 그럼, 율법에 대해 죽었다는 말인데.. 그 말인즉, 더 이상 율법의 지배력 아래 놓여있지 않다는 말이 된단 말씀. 누가 결혼했다가 한쪽이 죽으면 이젠 더 이상 결혼의 속박에 매일 필요가 없어지는 것처럼 말예요,
* 그래서 여러분은 율법이 말하는 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이 걸 잘 지키면 복 받고, 한 치라도 어기면 저주에 저주를 받을 것이다’(신28장)는 것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졌다는 거죠.
* 그동안 밝혀진 바에 따르면(3:30), 율법은 주로 사람이 실패하는 현장에 나타나 그를 정죄하고 고발하는 역할(경찰 역할)을 해왔으니까, 이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림으로써 이 율법의 정죄로부터도 벗어나게 되었다는 말씀.^^
2. 그럼, 율법은 나쁜 녀석? 아니라니까 자꾸 그러네!(v7-12)
* 그러고 보니까, 율법 참 나쁜 역할을 했네요. ‘그놈 참 나쁘다.’라는 생각이 들지 모르겠으나, 그게 아니라구요.
*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이유는 “나를 존중하고 사랑하고 살면, 이 모든 것은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행동들이야.”라는 건데, 그 율법이 나쁠 리가 없죠.
* 근데 막상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율법을 시행해보니, 엉뚱한 결과가 나온 겁니다.
*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근본 사랑하지 않으니, 그 율법을 제대로 따를 수 없는 게 필연적인 거죠.
* 한편, 이스라엘 중에 정말 순전한 마음으로 율법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이 있어도, 또 다른 요소가 작동해서 그를 매번 실패하도록 만들어버리는데요.. 그게 바로 ‘죄의 유혹’이라는 겁니다.
* 본문에서 ‘죄’는 마치 인격을 가진 존재처럼 묘사되고 있습니다. 사탄이라고 봐도 무방 할 것 같아요.
* 이 죄라는 녀석이 우리들 마음속에 슬그머니 들어와서 자기가 내 진짜 마음인 것처럼 나에개 착각을 일으킨단 말이죠., 내 진짜 마음이 하나님을 따르고자함에도 불구하고, 나를 유혹해서 자기가 진짜라고 우리고, 나를 자기 욕망대로 끌고 간단 말예요. 왜, 엄마들이 마음속에 까만 마음, 하얀 마음이 있다고 아이들에게 이야기하잖아요?
* 근데 더 중요한 건, 이게 자기인 것처럼 생각과 느낌과 욕망을 불러일으켜놓고서, 막상 유혹에 넘어가 실패하고 나면, 그 다음엔 율법이 등장해서 나를 정죄하기 시작한다구요. 율법의 경찰 기능이 참, 이럴 때 힘을 발휘해서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마네요...ㅠㅠ
* 한편, 죄가 우리를 유혹하는 과정에 율법을 교묘하게 이용하기도 하는데요(바울이 이 점을 밝힌 건 대단한 묵상 능력이라는 생각이 듭니다요^^), 어떤 금지명령이 주어지면, 이상하게 울 마음에는 그걸 꼭 어기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죄는 이걸 또 교묘하게 이용하죠. 하와가 금지명령이 있었기에 더욱 유혹을 받은 것처럼 말예요.(이걸 좀 유식한 말로 하면, ‘반(反)제안성, contra-suggestibility : 어떠한 지시에도 부정적인 반응을 하고자 하는 성향’이라고 합니다.)
* 아무튼, 이 모든 과정에서 율법은 경찰기능을 하지만, 그렇다고 율법자체가 우리를 꼬드긴 게 아니니까,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선 한 게 맞습니다.
3. 죄와 내가 벌이는 내적 전투 현장, 결국은 죄의 포로로 잡혀가고 마는데...(v14-25)
* 아니, 율법이 선하다면, 우리가 율법을 따라 살면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거룩’을 이룰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 대답은, 아니올시다. 죄라는 놈이 있어서 율법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실제로 율법은 죄를 드러내 보여줌으로써 우리보고 그 죄를 처리하라고 미루는 것 같은데, 우리가 죄를 처리할 수 있을까요?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자.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한 번 봅시다.
* 이제 본격적으로 죄가 내 속에 들어와 벌어지는 일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 나는 율법을 따라 선한 것을 하고자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 하지만 내 속에 죄가 스며드는데요. 이 놈은 위에서도 말한 것처럼, 나를 가장해서 들어온다구요. 그래서 마치 내 속에서 두 마음이 싸우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나는 둘 다 내 마음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한 놈은 내 마음이 아니라 나를 가장한 죄인 거죠. 완전 위장한 게릴라입니다.
* 결국 나는 그에게 패하여 그를 따르고 맙니다. 더 엄밀히 말하면, 죄의 포로가 되어 죄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거죠.
* 율법을 알면 알수록, 이런 일은 계속 반복되고, 결국 나는 고통 속에서 부르짖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아!! 난 정말 비참하다. 누가 나를 이 갈등 상황 속에서 건져 줄 사람 없소?”
*** 여기까지가 선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 이상씩 경험하게 되는 내적 갈등과 절망을 정확하게 드러내 보여줍니다. 특히나 ‘율법’이라는 선의 기준을 갖고 살아가는 이스라엘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이런 절망감에 빠져들게 되는 거죠. 율법이 죄를 더욱 죄로 각인시켜주니까요(3:19).
* 바울은 이 상황에서 완전 분위기 반전, 새로운 이야기를 합니다.
* 이 절망감으로부터 벗아날 유일한 길은 바울이 만난 바,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으니까요.
4.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v25).
* 바울처럼 예수님을 만난 사람, 그를 통해, 그와 연합하여 죄에 대해 죽고, 하나님에 대해 다시 살아남을 경험한 사람은 이런 내적 갈등으로부터 나를 건져주신 하나님께 절로 감사와 찬송이 나오지 않을 수 없지 않을까요?
* 유진 피터슨의 The Message 번역을 한 번 볼까요? v24,25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해보았지만, 결국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나는 벼랑 끝에 서 있습니다. 이런 나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줄 수 있는 이 누구 없습니까? (정말 던져야 하는 질문은 바로 이런 것 아닙니까?) 감사하게도 답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같은 일을 하실 수 있고, 또 하신다는 겁니다. 마음과 생각으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싶어하지만, 죄의 세력에 끌려 전혀 엉뚱한 일을 행하는 우리의 모순 가득한 삶 속에 들어오셔서, 그분은 모든 것을 바로 세우는 일을 행하셨습니다.” 아멘!!
<주의> 바울이 말한 이 죄 아래 포로로 잡혀간 사람의 부르짖음은 지금 그리스도인인 나의 고민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나는 이미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그 옛 자아, 고통 속에서 부르짖는 그 옛 자아를 못 박아 버린 사람입니다. 예수와 함께 다시 살아서 성령과 동행하는 사람입니다.
* 지금 나 자신을 두고서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하지만 육신이 연약해서 죄의 법을 따르는” 고통 속에 있다고 착각하면 안 됩니다.
*** 하지만, 그렇다고 죄가 우리를 유혹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죄(사탄)은 예수님도 유혹했으니까요. 우리는 날마다 죄의 유혹 앞에 서지만, 과거 예수님을 모르던 시절처럼 그렇게 판판이 깨지고 신음하고 그러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승리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 그라나, 우리 자신이 죄와 싸워 이길 수 있을 거라는 착각을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 죄와 맞서 싸우는 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능력이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걸 명심히야 합니다.
* 그래서 주께서 가르쳐주신 기도 속에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라는 간절한 청원이 들어있는 겁니다.
* 죄와 맞서 싸우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완전군장을 갖추지 않을 수 없는 거구요. 하나님이 주시는 무기인 진리, 정의, 평화의 복음, 믿음, 구원, 말씀으로 무장하고 기도로 싸워나가는 것.(엡6:10-18)
* 이 모든 전투에서 능히 승리하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며 오늘도 그와 함께 전쟁터로 고고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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