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10월7일(월) 롬9:14-23 큐티목소리나눔>
“토기가 토기장이에게 대들 수는 없는 법, 하나님의 절대주권 앞에서”
1. 하나님이 불공평하신 분이신가?
* 바울은 9장에서 이야기를 꺼내면서, “아브라함에게서 태어났다고 해서 다 이스라엘로 부르심을 받은 게 아니다. 에서는 버리고 야곱을 택한 것처럼, 지금 수많은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도 구원하시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 그러니 당연히 사람들이 질문하겠죠. 그건 불공평하다고. 어떻게 똑같은 사람으로 태어나 누구는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운명으로, 다른 사람은 버림받을 운명을 타고나냐구요.. 이른바 금수저, 흙수저야 사람들이 만들어낸 불공평한, 죄된 행동이지만, 하나님이 그러시면 안 되는 것 아니냐구요!!
* 맞습니다. 백번 맞습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두셨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 이전에 이렇게 불만을 터트리는 우리들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 마음의 중심은 집고 넘어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 머저 생각해볼 것은요, 지금 우리가 하나님께 “난 당연히 구원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야! 어떻게 날 버릴 수가 있어?”라고 따질 형편이냐는 거죠. 우리는 모두가 다 하나님을 버리고 내가 선악을 판단하는 최종권자라고 주장하면서 살고 있는,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은 사람들이잖아요? 이제 남은 건 오직 심판관이신 하나님이 내리실 판결 밖에 없는 처지란 말이죠.
* 그런데,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자비로우셔서 우리들 중에 몇몇을 무죄방면하기로 하신 겁니다. 집행유예를 넘어서 무죄판결을 하신단 밀이죠. 이건 명백한 범죄를 저지른 죄수입장에서 보면 완전히 은혜를 누리게 된 겁니다.
* 근데, 그 재판관에게 누군 무죄방면하고 누군 유죄판결이냐고 따질 형편이 되느냐 말예요. 그저 용서해주신 게 감사할 따름이죠. 풀려난 사람이 뒤돌아보면서 왜 쟤는 안 구해주냐고 따질 처지가 못 되는 거죠, * 다음으로 더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는데요, 바울은 이 이야기를 토기장이가 토기를 비유로 들어 설명합니다. 토기장이가 토기를 빚었는데, 그 토기가 주인더러 “내 사용목적은 이것이다.”라고 주장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어 설명합니다. 그 그릇을 귀히 쓰든, 천히 쓰던지 그건 주인 마음이라는 거죠. 심지어 출애굽 상황에서 파라오가 한 일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해내시고자 그에게 악역을 맞기셨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곤 반문하죠. “그렇다 한들, 그게 어떻다는 말이냐? 네가 그걸 따질 자격이 있는 사람이냐?”라구요.
*** 이 지점에서 우리는 누구나 마음에 저항감이 생기는 걸 느낍니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럴 수가? 라는 적극적인 항변으로부터, 뭔가 마음에 찜찜함이 남아 있는 것 같은 소극적인 저항감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마음이 심히 불편해집니다.
* 가만 묵상해보면,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우리 인생을 우리가 주인공이 되어 살아야 한다는 근원적인 죄성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내 속에 이미 자리하고 있는 이 죄성이 불뚯 솟아오르는 거죠.
* 요21장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다음, 베드보부고 나를 따라오라고 하시죠. 그때 베드로가 말합니다. 약간 경쟁 상대였던 요한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재는 어떻게 됩니까? 라고 묻죠. 그때 예수님이 답합니다. “내가 걔를 어떻게 하든지 그건 내 마음이다. 네가 알 바 아니다. 그저 너는 너와 나 사이만 신경 쓰면 된다. 너는 나를 따라올지 말지 결정하면 된다는 말이다.”라고 말이죠.
* 중요한 건, 하나님이 다른 사람들이야 그 운명을 어떻게 결정하셨든, 내가 주님을 따르는 사람으로 부름을 받은 사실만으로도 감격 속에 살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처지를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게 바로 창조주요 심판주이신 하나님의 주권을 진심으로 인정하는 고백인거죠.
*** 물론, 이른바 합리적인 질문은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꽉 막힌 분은 아니시니까요.^^
* 오늘의 논리와 이야기에 따르면 당연히 이런 질문이 듭니다. “그럼 버리기로 작정된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이 나를 책망하거나 죄를 추궁할 아무런 권한이 없지 않나요? 그렇게 살 운명으로 태어났으니까요”
* 두 가지 대답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는 측면에서의 대답.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다 해도 할 말이 없어. 왜냐면 우리는 피조물이니까.”
& “이미 우리는 하나님이 원래 만드신 인간 목적과 존재 이유를 벗어나 내가 하나님이라 선언한 죄인이라. 무슨 판결을 내리시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처지라, 할 말 없음.”
* 다른 한 대답은 정말 우리가 듣고 싶은 대답, 들으면 위로가 되고 희망이 생기는 대답입니다. 바로 “아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있다.”라는 거죠. 이 이야기는 바로 이어지는 본문에 나옵니다. 오늘도 역시 To be continue~~ㅎㅎ
* 아무튼, 하나님이 절대 주권을 강조하는 말씀 앞에 내 속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저항감을 잘 살펴보고서 내가 하나님을 정말, 제대로 주권자로, 내 삶의 주인으로, 또 전 우주만물의 주인으로 받아들이는지를 깊이 묵상해봅시다. 그리고 제대로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토기가 토기장이에게 대들 수는 없는 법, 하나님의 절대주권 앞에서”
1. 하나님이 불공평하신 분이신가?
* 바울은 9장에서 이야기를 꺼내면서, “아브라함에게서 태어났다고 해서 다 이스라엘로 부르심을 받은 게 아니다. 에서는 버리고 야곱을 택한 것처럼, 지금 수많은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도 구원하시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 그러니 당연히 사람들이 질문하겠죠. 그건 불공평하다고. 어떻게 똑같은 사람으로 태어나 누구는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운명으로, 다른 사람은 버림받을 운명을 타고나냐구요.. 이른바 금수저, 흙수저야 사람들이 만들어낸 불공평한, 죄된 행동이지만, 하나님이 그러시면 안 되는 것 아니냐구요!!
* 맞습니다. 백번 맞습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두셨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 이전에 이렇게 불만을 터트리는 우리들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 마음의 중심은 집고 넘어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 머저 생각해볼 것은요, 지금 우리가 하나님께 “난 당연히 구원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야! 어떻게 날 버릴 수가 있어?”라고 따질 형편이냐는 거죠. 우리는 모두가 다 하나님을 버리고 내가 선악을 판단하는 최종권자라고 주장하면서 살고 있는,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은 사람들이잖아요? 이제 남은 건 오직 심판관이신 하나님이 내리실 판결 밖에 없는 처지란 말이죠.
* 그런데,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자비로우셔서 우리들 중에 몇몇을 무죄방면하기로 하신 겁니다. 집행유예를 넘어서 무죄판결을 하신단 밀이죠. 이건 명백한 범죄를 저지른 죄수입장에서 보면 완전히 은혜를 누리게 된 겁니다.
* 근데, 그 재판관에게 누군 무죄방면하고 누군 유죄판결이냐고 따질 형편이 되느냐 말예요. 그저 용서해주신 게 감사할 따름이죠. 풀려난 사람이 뒤돌아보면서 왜 쟤는 안 구해주냐고 따질 처지가 못 되는 거죠, * 다음으로 더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는데요, 바울은 이 이야기를 토기장이가 토기를 비유로 들어 설명합니다. 토기장이가 토기를 빚었는데, 그 토기가 주인더러 “내 사용목적은 이것이다.”라고 주장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어 설명합니다. 그 그릇을 귀히 쓰든, 천히 쓰던지 그건 주인 마음이라는 거죠. 심지어 출애굽 상황에서 파라오가 한 일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해내시고자 그에게 악역을 맞기셨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곤 반문하죠. “그렇다 한들, 그게 어떻다는 말이냐? 네가 그걸 따질 자격이 있는 사람이냐?”라구요.
*** 이 지점에서 우리는 누구나 마음에 저항감이 생기는 걸 느낍니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럴 수가? 라는 적극적인 항변으로부터, 뭔가 마음에 찜찜함이 남아 있는 것 같은 소극적인 저항감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마음이 심히 불편해집니다.
* 가만 묵상해보면,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우리 인생을 우리가 주인공이 되어 살아야 한다는 근원적인 죄성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내 속에 이미 자리하고 있는 이 죄성이 불뚯 솟아오르는 거죠.
* 요21장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다음, 베드보부고 나를 따라오라고 하시죠. 그때 베드로가 말합니다. 약간 경쟁 상대였던 요한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재는 어떻게 됩니까? 라고 묻죠. 그때 예수님이 답합니다. “내가 걔를 어떻게 하든지 그건 내 마음이다. 네가 알 바 아니다. 그저 너는 너와 나 사이만 신경 쓰면 된다. 너는 나를 따라올지 말지 결정하면 된다는 말이다.”라고 말이죠.
* 중요한 건, 하나님이 다른 사람들이야 그 운명을 어떻게 결정하셨든, 내가 주님을 따르는 사람으로 부름을 받은 사실만으로도 감격 속에 살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처지를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게 바로 창조주요 심판주이신 하나님의 주권을 진심으로 인정하는 고백인거죠.
*** 물론, 이른바 합리적인 질문은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꽉 막힌 분은 아니시니까요.^^
* 오늘의 논리와 이야기에 따르면 당연히 이런 질문이 듭니다. “그럼 버리기로 작정된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이 나를 책망하거나 죄를 추궁할 아무런 권한이 없지 않나요? 그렇게 살 운명으로 태어났으니까요”
* 두 가지 대답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는 측면에서의 대답.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다 해도 할 말이 없어. 왜냐면 우리는 피조물이니까.”
& “이미 우리는 하나님이 원래 만드신 인간 목적과 존재 이유를 벗어나 내가 하나님이라 선언한 죄인이라. 무슨 판결을 내리시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처지라, 할 말 없음.”
* 다른 한 대답은 정말 우리가 듣고 싶은 대답, 들으면 위로가 되고 희망이 생기는 대답입니다. 바로 “아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있다.”라는 거죠. 이 이야기는 바로 이어지는 본문에 나옵니다. 오늘도 역시 To be continue~~ㅎㅎ
* 아무튼, 하나님이 절대 주권을 강조하는 말씀 앞에 내 속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저항감을 잘 살펴보고서 내가 하나님을 정말, 제대로 주권자로, 내 삶의 주인으로, 또 전 우주만물의 주인으로 받아들이는지를 깊이 묵상해봅시다. 그리고 제대로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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