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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IVF영성식탁/[시심묵상]하창완목사의 '맑은물소리'

<2018년 9월 17일(월) 시89:19-52>“하나님의 약속, 도대체 어디에 있는데요?”

<2018년 9월 17일(월) 시89:19-52 큐티목소리나눔>
“하나님의 약속, 도대체 어디에 있는데요?”

*** 시편은 한편을 통으로 읽고 묵상해야합니다. 이시를 나눠서 읽으면 완전 왜곡된 묵상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면 세 번째 연이 핵심인데, 이 연을 염두에 두고 1, 2연을 읽어야 하거든요. 안 그러면 뒤에 숨어 있는 시인의 마음을 완전 놓치게 됩니다. 따라서 길더라도 한꺼번에~~^^ (하지만, 저도 너무 길어서 하루에 다 다룰 수 없어서 두 번 나눠서 묵상합니다요..ㅠㅠ 하지만 전체 주제와 문맥을 염두에 두고서 묵상과 나눔을 해보겠습니당^^)

1. 하나님, 당신이 지난 시절에 베푸셨던 자비와 약속은 어디 있습니까?
 * 이 시는 말라기 시대(?)의 암울한 시절, 더 이상 하나님의 약속도, 자비도 보이지 않는 절망감 속에서 역사를 돌아보며 탄식하는 기도입니다.
 * 더 이상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은 존재하지 않으며, 페르시아, 알렉산더, 로마로 이어지는 외세의 침략은 끝없이 이어지고, 제국의 지배하에 다윗왕가의 부활은 꿈도 못 꾸는 상황이 되어버린 시절을 탄식하는 시입니다.
 * v1-18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 사랑을 노래합니다.
  “내가 영원히 주님의 사랑을 노래하렵니다. 주님의 사랑은 영원토록 굳게 서 있고, 신실하심은 하늘에서 견고합니다.”
  하지만 마지막 연에 나오는 탄식을 전제로 읽으면, 이 찬양은 참으로 비장미가 넘치는 노래입니다. 현실에서는 전혀 하나님의 이름이 드러나지도 않는데, 그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인의 마음으로 읽으면 단순한 찬양이 아니라 정말 비장한, 눈물 나는 찬양이 됩니다.
 * v19-37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을 상기합니다.
  “내가 나의 거룩함을 두고 한 번 맹세하였는데 어찌 다윗을 속이겠느냐?”
  ‘하지만 이 약속이 눈앞의 현실에서는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라는 말을 삼기고서 단순히 하나님의 약속을 재확인합니다.
 * v38-51 이제야 비로소 하고 싶은 말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기름 부으신 왕에게 노하셨습니다. 다윗에게 맹세하신 그 약속은 다 어디 갔습니까? 주님, 당신의 종들이 받는 치욕을 기억하소서..”
 * v52 이시의 종결이자, 제3권의 마무리 송영.

2. v19-37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을 상기합니다.
 * 앞 연에서 “정의와 공정이 주님의 보좌를 붇들고 사랑과 신실이 주님을 시중들며 앞서 간다”라고 노래한 시인은 이제 다윗에게 약속하신 언약을 떠올립니다.
 * “나는 내 종 다윗을 찾아서 내 거룩한 기름을 부어주었다. 내 손을 그를 붙들어주고, 원수들을 그의 앞에서 격파하고 쳐부수겠다. 나는 그를 사랑하고 내 약속을 성실하게 지킬 것이며, 내가 그에게 승리를 안겨주겠다.”
 * “또한 나는 그 자손이 내 법을 내버리고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그 죄를 물어 채찍으로 치고 매질 학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약속한 나의 진실함은 변하지 않을 것이고, 내 언약도 깨뜨리지 않겠다.”
 *** 시인이 이 약속을 떠올린 이유는 이제 다음 연에서 쏟아낼 탄식과 탄원의 기초로 삼기 위함이죠.

3. v38-51 “그러나, 주님은 그 기름 부으신 왕에게 노하셨습니다.”
 * 지금 시인이 처한 상은, 이방 나라에 포로로 잡혔다가 돌아왔으나, 다윗의 왕권이 회복되기는커녕 계속되는 외적의 침입, 식민지 수탈 속에 허덕이고 있으니..
 * “도대체 이게 어찌 된 겁니까? ”라고 시인은 하나님을 다그칩니다.
 * 그 약속은 다 어디 갔고, 그 맹세는 다 어디 갔습니까? 주님은 당신이 기름 부으신 왕에게 노하신겁니다. 지금...
 * 도대체 언제까지입니까? 언제까지 이 수모를 참아야 합니까? 제발...

*** 이 시인의 원망을 들으면서, 이상하게도 우리 속이 좀 시원해지는 걸 느낍니다. 살다보면 주님을 원망하고픈 마음이 막 생기기도 하는데, ‘우째 하나님을 원망하랴?’는 맘이 들어서 감히 말도 못했을 때가 많은데, 시인이 이렇게 대놓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말을 들으내 내 속이 시원해지는 거죠^^  아니? 이렇게까지 해도 되냐 싶기도 하지만, 성경이니까 안심하고 이 기도문을 일고, 내 마음을 담아보는 거죠~ ㅎㅎ
 * 이게 시편이 성경의 자리에 있는 까닭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상황 중에 하나님께 나아가 모든 말을 쏟아놓을 수 있도록 안내해주니까요. 그저 내 상화에 맞는 시편을 골라서 읽기만 해도 기도가 되고, 찬양이 되고, 탄식, 탄원이 되니까요^^

*** 사실, 우리가 사는 인생 가운데 고통을 겪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각자 정도가 다르고 종류가 다를 뿐, 한 사람 한사람에게 그 고통의 무게는 정말 감당하기 힘든 법인데...
 * 이럴 때 누군가 붙잡고 실컷 울기라도 하면, 조금은 속이 시원해지잖아요?
 * 또 이 고통 속에서 아무도 탓할 수조차 없이 고스란히 ‘이게 다 내 탓이야. 누구를 원망할 수 있겠어?’라고 자리를 후벼 파는 경우가 제일 힘들 때인데, 이럴 때 누군가의 가슴을 치며 “도대체 나한테 왜 그러는데?”라고 원망이라도 쏟아놓을 데가 있으면, 그나마 내 탓이라는 자괴감에서라도 벗어날 수 있잖아요?
 * 그리고 그 원망의 대상이 내 가슴 깊은 설움과 한탄을 다 가슴으로 받아내는 넓은 품이라면 게다가 뒤끝 없어서 내 말에 맘 상하기보다는 그저 묵묵히 받아주는 분이라면, 더 없이 속 시원하고, 원망을 쏟아놓는 중에 오히려 나도 모르게 마음에 평화가 찾아오는 반전을 경험하는 거 아닐까요?
 * 시인은 바로 그런 분, 우리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 거죠. 처음엔 점잖게(?) 예의를 차려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다음엔 약속을 떠올리면서 마음이 점점 내 현실에 대해 하나님을 원망하기 사작 하는데.. 왜? 왜? 왜 나한테? 라고 부르짖는 이 시인을 하나님께서 꼭 껴안고 계시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 나에게도 이런 하나님의 넓은 가슴이 있어서, 기댈 언덕이 있어서 참 좋습니다. 그래서 처음 고백한 시인의 노래 또한 단지 예의가 아니라, 깊은 진정성이 묻어나는 고백이 되는 거죠. 늘 이래왔으니까요.. 늘 하나님 앞에서 쏟아놓으면 그 다음은 또다시 힘을 내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니까요...
 * 오늘도 이렇게 모든 상황 가운데 동행하시며 내 마음을 품어주시는 주님이 있어서 행복한 하루를 출발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