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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IVF영성식탁/[시심묵상]하창완목사의 '맑은물소리'

<2019년4월24일(수) 요일4:1-21 큐티목소리나눔>“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2019년4월24일(수) 요일4:1-21 큐티목소리나눔>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1. 1. 어떻게 가짜를 구별할까?
*** 요한은 사랑 이야기를 한참 하다가 갑자기 거짓예언자 이야기를 불쑥 꺼냅니다. 그러고는 또 사랑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 아마 ‘사랑하다보면, 하나님 앞에서 확신을 갖게 되는데, 이건 우리가 성령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이다’는 이야기를 하다 보니, 갑자기 ‘성령’에서 꽂혀서 그놈의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이 떠오른 것 같습니다. 그 사람들이 자기들만 특별한 영을 받았다고 주장하니까요. 그게 아니다. 우리가 진짜 특별한 영, 곧 성령을 받은 거라는 얘길 하고 싶어서 살짝 문맥에서 벗어나 거짓예언자들 이야기를 짧게 합니다.
 * 우린 또 이 짧은 단락을 묵상하고 가야겠죠? ㅎㅎ

 * 우선 내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가르쳐주시고 분별력을 키워주신다는 걸 믿으시라구요~~
 * 다음으로 예수님을 부인하면 이건 틀림없는 가짜!!! 그것도 예수님이 진짜 하나님이란 것과, 동시에 진짜 인간이란 걸 부인하면 이건 진짜 가짜!!
 * 그럼, 반대로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과 참 인간이심을 믿으면, 같은 성령 안에 거하는 동지들이란 사실!!
 *** 지난번에 2:15~ 묵상하면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당시에는 예수님의 신,인성이 문제가 되었다면, 요즘은 어제 묵상한 것처럼 예수님의 사랑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해서 가짜인 경우, 곧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 머물러있지 않는 무늬만 그리스도인이 많은 게 제일 큰 문제점인 것 같습니다. ㅠㅠ 

2.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 요한은 다시 사랑의 주제로 돌아옵니다. 그러면서 어제 묵상한 내용을 다시 반복하면서 조금씩 더 깊이를 더해가는 느낌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갑니다.
 * 만약 주제만 딱 붙잡고 공부하듯이 이 구절들을 바라보면 반복되는 이야기 속에 흥미를 잃기 쉬울 것 같습니다. 사도요한이 왜 이리 이야기를 반복하는지 그 느낌을 살려서 묵상을 하면 좋을 텐데요... 끙...
 * 왜 끙이냐구요? 느낌을 따라가다 보면 마음이 힘들어서요...ㅠㅠ

 *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래서 우리가 사랑하면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볼 수 가 있고,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된다.
 * 그럼 사랑이 구체적으로 뭐냐?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님을 통해 하신 일을 보면 알 수 있다. 인간으로 보내시고 화목제물로 삼으신 것 말이다.
 *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게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거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의 그 사랑에 감격해서, 그 사랑의 포로가 되어, 그 사랑에 녹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된 것이다.
 * 우리가 이렇게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이 드디어 완성되는 것이다.
 * cf. 누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자매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v20).

*** “무례한 기독교”라는 리처드 마우의 책이 있습니다. 다원주의 세계를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인이 무분별한 포용주의와 독선적 배타주의라는 양극단을 벗어나 어떻게 확신과 더불어 공손을 아우르는 시민적 소양을 기를 것인지를 고민하는 책입니다. 정말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책이란 생각이 듭니다.
 * 사랑을 묵상하면서, 구체적으로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삶을 묵상하면서, 이 책과 더불어 이 책에서 경고하는 있는 독선적 배타주의라는 함정에 이미 갇혀버린 한국 교회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한숨과 함께....
 그가 종교적 신념이 다르다고, 인종이 다르다고, 윤리적 기준이 다르다고 그렇게 악마 보듯이 바라보고 행동하는 대부분의 한국교회 속에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오늘 말씀은 그저 소 귀에 경 읽기 인 것 같습니다.
 아니,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수많은 혐오집회에 참석하고, 실제로 말로 내뱉고 살면서도 자기가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 자체를 못하는 것 같습니다.
 * 또 한편, 교회 안에서 그렇게 다른 사람들 험담을 자주하면서도 자기가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일을 하고 있음을 모른단 말입니다. 오죽하면 교회 안에서의 사귐을 PR한다고 할까요. ‘피할 것은 피하고 알릴 것만 알린다.’ PR.... 진실한 나눔은 눈곱만큼도 없고, 그저 적당한 선에서 방어벽을 치고 서로를 만나는 교회 안의 나눔... 결국 사랑은 떠나가고 없다는...ㅠㅠ
 * 이른바 ‘사랑 나눔 사업’은 잘해요. 교회가... 반찬 만들어 독거노인에게 나눠주기, 장애우 돕기, 자선 바자회 등등... 이런 게 나쁜 것게 아니라, 이런 건 하면서 동시에 한 입으로 다른 이들 험담하고, 각종 혐오발언들을 쏟아놓고... 도대체 내적으로 인격적 통합이 안 되어있어요... 정말!!!
 * 게다가 거시적인 하나님나라의 시각이 없으니, 자기들이 뭔 짓을 하고 있는지 통합적인 시각이 없어서, 정말 잘못한 일인지도 깨닫지도 못하고 있단 말입니다. 마치 지난 양승태 대법원에서 박정희정권의 긴급조치는 위헌이지만 그걸 발동한 박정권은 고도의 정치행위를 한 거라 불법을 저지른 게 아니라는 궤변을 늘어놓은 것이랑 똑 같죠. ‘도둑질은 죄인데 그 도둑은 죄를 짓지 않았다.’ 뭐 이런 셈이죠.
 “우리 교회는 사랑이 많아. 이런 저런 섬김을 많이 해.” 라고 하면서 동시에 쏟아내는 각종 혐오 발언들은 그 사랑이 없는 행위라는 걸 전혀 깨닫지 못하는 거란 말입니다.
 * 거시적 하나님나라의 시각이란 뭔가 하면요... 다른 것도 많지만 오늘 주제와 관련해서는 하나님 나라에서는 ‘사랑=정의=공평=평화=진리’라는 걸 알고 살아가는 겁니다. 정의를 행하는 것이 곧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요, 평화를 추구하는 것 역시 사랑을 실천하는 것임을 알면, 내 삶이 통합된 행동으로 채워질 거란 얘기입니다.

2.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v18).
 * 가장 심각한 문제는 우리들이 갖고 있는 신앙이 두려움에 근거한 신앙인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 벌 받지 않기 위해서 마지못해 따라가는 신앙. 이런 걸 하면 하나님이 벌주실 거야. 저런 걸 안하면 하나님이 벌주실 거야... 이런 식으로 늘 두려워하면서 종이 상전 눈치 보듯 신앙생활을 하니까, 자기도 자유롭지 못하고 남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여유가 없는 거죠.
 * “두려움은 징벌과 관련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v18) 이 말씀이 그대로 팍팍 와 닿습니다.
 *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하신 일은 바로 완전 죽일 놈인 나를 용서하시고 살려주신 거잖아요? 그러니 그 사랑에 눈을 뜨면, 죽일 놈도 살려주셨는데, 이런 작은 것 하나는 그저 용서해주세용~~ 하면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이란 걸 믿게 되고, 하나님 안에서 내가 완전히 받아들여졌다는 사실로 인해 정말 편안해진단 말씀!!
 * 이걸 제대로 누려야 진짜 그리스도인이 된다구요~~ 뭔 잘못을 하나 저지르면 하나님이 팔다리 자르실 것 같은 두려움에서 벗어나서요... 왜 십일조 떼먹으면 하나님이 열배는 더 손해 보게 하신다는 전설 같은 협박들이 교회 안에 늘 존재하잖아요? 그런 것들로부터 자유롭게 되어야 하는 거죠. 그래서 모든 것이 가한, 동시에 모든 게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기도 하고 안하기도 하는 삶이 된다는 거죠.
 * 그런 마음의 평화가 자리한 다음 다른 사람을 바라보면, 뭔가 전혀 다른 세상을 보게 되는 거죠.  아무리 죽일 놈이라도 나보다는 좀 덜한 사람처럼 보이고, 그러니 당연 하나님께서는 그도 용서하실 게 당연한 거라. 내가 그를 비난하거나 정죄하거나 미워할 아무런 이유가 없어진단 말씀!! 그가 동성애자건, 무슬림이건, 공산주의자건, 진화론자건, 나를 죽도록 미워하는 사람이건 상관없이 적어도 내가 그에 대한 비난은 멈출 수 있고, 더 나아가 그저 한 사람으로 바라보고 만나고 같이 즐거워하고, 그런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이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겁니당~~~
 *** 참된 사랑을 누리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동안 우리 삶이 평화와 정의로, 공평과 진리로 가득하길 소망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