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 09일(월) 시119 :65-80 큐티목소리나눔>
“돌아보니 고난도 내게 유익했습니다.”
*** 지혜를 가르치고자
* 이시는 시편에서 제일 긴 시입니다. 무려 176절이나 됩니다.
* 지혜를 가르치고자 하는 목적으로 다양한 주제를 모아놓았습니다.
* 영식은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대로 한 연씩 구성해서 쭉 나열했습니다(아크로스틱, 답관체 라고 합니다).
* 전체적인 통일성이 없기 때문에 통으로 묵상할 필요가 없고, 또 길이가 너무 길어서 한꺼번에 묵상하기도 불가능합니다. 시심의 편집대로 두 연씩 묶어서 묵상하고 있습니다.
1. 고난을 당한 게 오히려 유익이 되었습니다.
* 시인은 고난을 당하기 전까지는 하나님을 떠나 잘못된 길을 걸었다고 고백합니다.
* 그런데 고난을 당한 다음, 그는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게되었노라고 고백합니다.
* 그래서 지금 돌아보면, 그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고난을 당한 게 오히려 유익한 것이었다고 고백하는 거죠. 고난이 없었고, 잘 나가던 때 그대로 쭉 갔더라면 난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으로 쭉 사는 거니까요...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인 거죠.
*** 맞습니다. 맞고요~~^^ 우리 모두의 경험이 다 녹아있는 이야기입니다.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이도 하고.. ㅎㅎ
* 왜 우리들은 경제적으로든 명예로든 이른바 잘 나갈 때는 하나님을 잊기가 쉬운 걸까요? 근원적으로 따져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형상, 당신의 모든 능력을 다 주셔서 지으셨고, 창조세계를 경영하라고 위임하셨기에 벌어진 일이 아닐까요? 내가 뭔가를 갖고서 뭔가를 움직일 파워가 있으면 내가 최고인 줄 아는 거죠. 내가 하나님 자리를 차지하고 호령하고 부리려하는 본성으로 인해 벌어지는 일인 것 같습니다.
* 그러다 쫄딱 망한다든지, 병이 들던지, 하여간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장벽을 만날 때야 비로소 누군가의 도움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나를 발견하게 되고, 주님 도와주세요.. 그러고 주님을 찾는 거죠.
* 그래서 잠언에서도 부요하면 하나님 없다할까 두렵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도 재물을 심지어 불의한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셨구요...
* 있을 때, 뭔가 가졌을 때, 삶이 안정적일 때, 부요할 때에도 주님을 놓치지 않고, 그 모든 게 주님 것임을 고백하며 사는 ‘겸손한 부자’는 없는 걸까요? ㅠㅠ
* 사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다시 부활하셨을 때, 우리에게 이 길을 열어주셨잖아요? 성령을 부어주시고, 성령충만한 삶을 살라고. 그러면 겸손한 부자든, 겸손한 왕이든 뭐든 할 수 있다 하셨죠. 실제로 초대교회 성도들은 가진 것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살았구요.
* 우리가 경건의 연습을 하는 까닭도 이런 삶을 살고자 함임을 새기게 됩니다.
2. 고난 중에서도 선하신 주님 판단이 옳은 줄 알고 따릅니다.
** <주의> 시인은 주님께서 “나이게 고난을 주신 것도, 주님 판단이 옳을 줄 압니다.”라고 고백합니다. 히브리인들은 세상의 모든 일이 다 주님 주권 하에서 일어난 일임을 고백하기 때문에 모든 고난도 다 주님께서 주신 거라고 이야기합니다. 물론 어떤 고난은 주님이 우리를 시험하기 위해서 주시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는 것이 좋은 예입니다. 시험 중에는 고난과 고통이 따르죠. 이런 고난은 주님과의 선행된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라 우리가 충분히 주님으로부터 오는 고난임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 이럴 때 오늘 시인처럼 주님 판단이 옳은 줄 믿고 나를 내 던져서 주님 선한 길을 선택함으로써 내 믿음과 신앙의 여정이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거죠.
*** 하지만 이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고난이나 고통은 다른 원인으로 주어집니다.
* 우리가 만나는 고난이나 고통, 질병 중 어떤 것은 모든 피조세계가 다 어그러지고 비틀어져서 생긴 왜곡현상 중에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고난이기도 합니다. 질병이나 자연재해 같은 게 대표적이죠. 또 어떤 것은 내가 명백히 잘못해서 받게 되는 결과이기도 합니다. 범죄 한 후 감옥살이 하는 것처럼요. 또 어떤 고난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겪게 되는 환란과 핍박일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이유나 원인을 알 수도 없는 그냥 고난과 고통일 때가 많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원인으로 고통이 찾아온다는 것을 아는 게 중요합니다.
* 만약 히브리인들처럼 모든 고통이 다 주님이 주신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처음엔 주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하다가, 나중엔 “주님, 왜 나만 미워하시는 겁니까?”, “왜 나를 이 고통 속에 밀어 넣으셨습니까?”라고 항거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심지어 주님을 떠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욥의 아내처럼 말예요.
* 하지만, 우리 하나님을 안다면, 그 하나님이 어떤 경우에든 나와 함께 그 고통에 맞서고 계심을 분명하게 믿고서 주님께 도움을 청하고, 위로해달라고, 힘 달라고 이야기 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이 내 옆에 계심을 믿고 알기에 그 사실만으로도 위로와 힘을 얻게 되기도 하구요.
* 내가 그런 사람이기를~~^^
“돌아보니 고난도 내게 유익했습니다.”
*** 지혜를 가르치고자
* 이시는 시편에서 제일 긴 시입니다. 무려 176절이나 됩니다.
* 지혜를 가르치고자 하는 목적으로 다양한 주제를 모아놓았습니다.
* 영식은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대로 한 연씩 구성해서 쭉 나열했습니다(아크로스틱, 답관체 라고 합니다).
* 전체적인 통일성이 없기 때문에 통으로 묵상할 필요가 없고, 또 길이가 너무 길어서 한꺼번에 묵상하기도 불가능합니다. 시심의 편집대로 두 연씩 묶어서 묵상하고 있습니다.
1. 고난을 당한 게 오히려 유익이 되었습니다.
* 시인은 고난을 당하기 전까지는 하나님을 떠나 잘못된 길을 걸었다고 고백합니다.
* 그런데 고난을 당한 다음, 그는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게되었노라고 고백합니다.
* 그래서 지금 돌아보면, 그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고난을 당한 게 오히려 유익한 것이었다고 고백하는 거죠. 고난이 없었고, 잘 나가던 때 그대로 쭉 갔더라면 난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으로 쭉 사는 거니까요...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인 거죠.
*** 맞습니다. 맞고요~~^^ 우리 모두의 경험이 다 녹아있는 이야기입니다.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이도 하고.. ㅎㅎ
* 왜 우리들은 경제적으로든 명예로든 이른바 잘 나갈 때는 하나님을 잊기가 쉬운 걸까요? 근원적으로 따져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형상, 당신의 모든 능력을 다 주셔서 지으셨고, 창조세계를 경영하라고 위임하셨기에 벌어진 일이 아닐까요? 내가 뭔가를 갖고서 뭔가를 움직일 파워가 있으면 내가 최고인 줄 아는 거죠. 내가 하나님 자리를 차지하고 호령하고 부리려하는 본성으로 인해 벌어지는 일인 것 같습니다.
* 그러다 쫄딱 망한다든지, 병이 들던지, 하여간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장벽을 만날 때야 비로소 누군가의 도움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나를 발견하게 되고, 주님 도와주세요.. 그러고 주님을 찾는 거죠.
* 그래서 잠언에서도 부요하면 하나님 없다할까 두렵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도 재물을 심지어 불의한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셨구요...
* 있을 때, 뭔가 가졌을 때, 삶이 안정적일 때, 부요할 때에도 주님을 놓치지 않고, 그 모든 게 주님 것임을 고백하며 사는 ‘겸손한 부자’는 없는 걸까요? ㅠㅠ
* 사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다시 부활하셨을 때, 우리에게 이 길을 열어주셨잖아요? 성령을 부어주시고, 성령충만한 삶을 살라고. 그러면 겸손한 부자든, 겸손한 왕이든 뭐든 할 수 있다 하셨죠. 실제로 초대교회 성도들은 가진 것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살았구요.
* 우리가 경건의 연습을 하는 까닭도 이런 삶을 살고자 함임을 새기게 됩니다.
2. 고난 중에서도 선하신 주님 판단이 옳은 줄 알고 따릅니다.
** <주의> 시인은 주님께서 “나이게 고난을 주신 것도, 주님 판단이 옳을 줄 압니다.”라고 고백합니다. 히브리인들은 세상의 모든 일이 다 주님 주권 하에서 일어난 일임을 고백하기 때문에 모든 고난도 다 주님께서 주신 거라고 이야기합니다. 물론 어떤 고난은 주님이 우리를 시험하기 위해서 주시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는 것이 좋은 예입니다. 시험 중에는 고난과 고통이 따르죠. 이런 고난은 주님과의 선행된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라 우리가 충분히 주님으로부터 오는 고난임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 이럴 때 오늘 시인처럼 주님 판단이 옳은 줄 믿고 나를 내 던져서 주님 선한 길을 선택함으로써 내 믿음과 신앙의 여정이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거죠.
*** 하지만 이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고난이나 고통은 다른 원인으로 주어집니다.
* 우리가 만나는 고난이나 고통, 질병 중 어떤 것은 모든 피조세계가 다 어그러지고 비틀어져서 생긴 왜곡현상 중에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고난이기도 합니다. 질병이나 자연재해 같은 게 대표적이죠. 또 어떤 것은 내가 명백히 잘못해서 받게 되는 결과이기도 합니다. 범죄 한 후 감옥살이 하는 것처럼요. 또 어떤 고난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겪게 되는 환란과 핍박일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이유나 원인을 알 수도 없는 그냥 고난과 고통일 때가 많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원인으로 고통이 찾아온다는 것을 아는 게 중요합니다.
* 만약 히브리인들처럼 모든 고통이 다 주님이 주신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처음엔 주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하다가, 나중엔 “주님, 왜 나만 미워하시는 겁니까?”, “왜 나를 이 고통 속에 밀어 넣으셨습니까?”라고 항거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심지어 주님을 떠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욥의 아내처럼 말예요.
* 하지만, 우리 하나님을 안다면, 그 하나님이 어떤 경우에든 나와 함께 그 고통에 맞서고 계심을 분명하게 믿고서 주님께 도움을 청하고, 위로해달라고, 힘 달라고 이야기 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이 내 옆에 계심을 믿고 알기에 그 사실만으로도 위로와 힘을 얻게 되기도 하구요.
* 내가 그런 사람이기를~~^^
'부산IVF영성식탁 > [시심묵상]하창완목사의 '맑은물소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시겠는가?” (0) | 2019.09.11 |
---|---|
“마지막 심판의 공정함 앞에서 현실을 살아가기” (0) | 2019.09.10 |
“하나님의 정의로운 최후심판 앞에서” (0) | 2019.09.06 |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진노” (0) | 2019.09.05 |
“바울이 로마 성도들을 그렇게 보고 싶어 하는 까닭은?” (0) | 2019.09.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