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9월12일(수) 롬3:9-20 큐티목소리나눔>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은 없다. 단 한사람도 없다.”
1. 유대인의 나은 점이 있나? 아니!
* 바울은 유대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특권이 있었음을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그 특권마저도 그들이 율법에 충실하지 못함으로써 실패했었죠.
* 덕분에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에서 욕먹는 일도 벌어졌구요.
* 그래서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따지고 보니 유대인이 더 나은 점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게 됩니다.
* 앞서 이방인들 중에 도덕론자들을 예로 들면서, 그들이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 사람들임을 말했었습니다. “이제 유대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이야기합니다. 너희들도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
* 이제 바울은 더욱더 중요한 것을 말합니다. “그 심판대 앞에서,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으로부터 유죄판결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라고.
2.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 앞서서 바울은 말하길,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모두 다 자기가 살아온 인생에 대해 양심의 법(비 유대인), 혹은 하나님의 율법(유대인)에 따라 심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 그래서 예수님을 모르던 조선조나 신라시대 사람들은 양심의 법대로 심판을 받고 혹 구원을 받는 사람도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해보았죠.
* 하지만, 실제로, 현실적으로 삶을 살아보면, 어느 누구든지 예외 없이 하나님의 정의와 공평, 진리라는 잣대 앞에서 제대로 산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성경의 여러 구절을 인용하면서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저지르는 온갖 악행들을 다 예로 들면서 말예요.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은 없다. 단 한사람도 없다!”라구요.
* 결국 구약 전체의 이야기는 하나님이 유대인들을 택하셔서 율법을 주시면서 “나를 사랑하고 공경하면 이 모든 것을 행할 수 있어”라고 격려하셨건만, 사람들은 그 놈의 그 ‘사랑’을 하지 못해서, 하나님을 공경하고픈 마음이 없어서, 결국 율법에 의해서 죄인으로 낙인찍히고 말았다는 sad ending 이 되고 만 겁니다.
*** * 우리 역시 이런 바울의 결론에 마음 깊이 수긍할 수밖에 없음을 잘 압니다.
* “하나님 앞에서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는 이 말씀 앞에, 그저 고개가 숙여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 십자가에서 그 죄 값을 다 짊어지시고 감당하신 그 일이 고맙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예수님 아니었으면 내가 어떻게 감히 하나님과 이렇게 친구처럼 알콩달콩 지낼 수 있나요? 고연 그런게 있기나 한 이야기인가요?
* 그래서 우리가 자신의 내면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죄성을, 그 깊이를 얼마나 심각하게 인식하는가에 비례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그만큼 더 깊이 누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썩을 대로 썩은 나를 위해,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니...”
“시작됐네. 우리 주님의 능력이. 나의 삶을 다스리고, 새롭게 하네. 자유하네. 죄와 사망으로부터, 나의 삶은 변하고 난 충만하네. 은혜로다. 주의 은혜, 한량없는 주의 은혜..” 아멘!!
* 또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보면, 내가 믿지 않는 다른 사람들 앞에 뭐라도 하나 잘난 척 할 게 없다는 것이 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다 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출발점에서 똑같이 출발하는 거니까요. 단지 나는 가다가 예수님을 어떻게 어떻게 만난 은혜를 누리게 된 것이 다를 뿐이죠.
* 제발, 내가 기독교인이라고 남들 앞에서 이상한 그 우월감 같은 거 같고 살지 맙시다요... 그저 예수님을 만나 은혜에 감격하고 살아도 모자라는 인생인데, 뭘 그걸로 유세부리고, 남들을 너무 쉽게 정죄하고, 그러고 사느냔 말예요..
* 한편, 예수님을 만나 그 은혜로 인해, 우리를 죄인이라 정죄하던 그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롭게 살아가는 게 우리 그리스도인의 인생길이잖아요? 근데 그런 자유로운 삶에다가 또 교회라는 이름과 권위로 새롭게 만든 이상한 규칙들로 얽어매려는 신율법주의자들도 되지 맙시다요. 하나님도 이스라엘에게 한 번 도전했다가 실패한 게 그 길인데, 예수그리스도가 새롭게 하셔서 완전 다른 길을 가도록 해주셨는데 왜 또 그리로 가려하느냔 말예요.(이게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힘써 부르짖는 이야기잖아요?)
* 율법으로는 단지 죄를 더욱더 깊이 인식할 따름입니다. 죄의 정죄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주신 예수그리스도를 따라 새롭게 난 길,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그가 주도하시고 공급하시는 삶의 리듬을 따라 자유롭게 소풍처럼 사는 인생이 되어봅시다요~~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은 없다. 단 한사람도 없다.”
1. 유대인의 나은 점이 있나? 아니!
* 바울은 유대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특권이 있었음을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그 특권마저도 그들이 율법에 충실하지 못함으로써 실패했었죠.
* 덕분에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에서 욕먹는 일도 벌어졌구요.
* 그래서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따지고 보니 유대인이 더 나은 점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게 됩니다.
* 앞서 이방인들 중에 도덕론자들을 예로 들면서, 그들이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 사람들임을 말했었습니다. “이제 유대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이야기합니다. 너희들도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
* 이제 바울은 더욱더 중요한 것을 말합니다. “그 심판대 앞에서,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으로부터 유죄판결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라고.
2.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 앞서서 바울은 말하길,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모두 다 자기가 살아온 인생에 대해 양심의 법(비 유대인), 혹은 하나님의 율법(유대인)에 따라 심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 그래서 예수님을 모르던 조선조나 신라시대 사람들은 양심의 법대로 심판을 받고 혹 구원을 받는 사람도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해보았죠.
* 하지만, 실제로, 현실적으로 삶을 살아보면, 어느 누구든지 예외 없이 하나님의 정의와 공평, 진리라는 잣대 앞에서 제대로 산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성경의 여러 구절을 인용하면서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저지르는 온갖 악행들을 다 예로 들면서 말예요.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은 없다. 단 한사람도 없다!”라구요.
* 결국 구약 전체의 이야기는 하나님이 유대인들을 택하셔서 율법을 주시면서 “나를 사랑하고 공경하면 이 모든 것을 행할 수 있어”라고 격려하셨건만, 사람들은 그 놈의 그 ‘사랑’을 하지 못해서, 하나님을 공경하고픈 마음이 없어서, 결국 율법에 의해서 죄인으로 낙인찍히고 말았다는 sad ending 이 되고 만 겁니다.
*** * 우리 역시 이런 바울의 결론에 마음 깊이 수긍할 수밖에 없음을 잘 압니다.
* “하나님 앞에서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는 이 말씀 앞에, 그저 고개가 숙여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 십자가에서 그 죄 값을 다 짊어지시고 감당하신 그 일이 고맙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예수님 아니었으면 내가 어떻게 감히 하나님과 이렇게 친구처럼 알콩달콩 지낼 수 있나요? 고연 그런게 있기나 한 이야기인가요?
* 그래서 우리가 자신의 내면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죄성을, 그 깊이를 얼마나 심각하게 인식하는가에 비례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그만큼 더 깊이 누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썩을 대로 썩은 나를 위해,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니...”
“시작됐네. 우리 주님의 능력이. 나의 삶을 다스리고, 새롭게 하네. 자유하네. 죄와 사망으로부터, 나의 삶은 변하고 난 충만하네. 은혜로다. 주의 은혜, 한량없는 주의 은혜..” 아멘!!
* 또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보면, 내가 믿지 않는 다른 사람들 앞에 뭐라도 하나 잘난 척 할 게 없다는 것이 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다 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출발점에서 똑같이 출발하는 거니까요. 단지 나는 가다가 예수님을 어떻게 어떻게 만난 은혜를 누리게 된 것이 다를 뿐이죠.
* 제발, 내가 기독교인이라고 남들 앞에서 이상한 그 우월감 같은 거 같고 살지 맙시다요... 그저 예수님을 만나 은혜에 감격하고 살아도 모자라는 인생인데, 뭘 그걸로 유세부리고, 남들을 너무 쉽게 정죄하고, 그러고 사느냔 말예요..
* 한편, 예수님을 만나 그 은혜로 인해, 우리를 죄인이라 정죄하던 그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롭게 살아가는 게 우리 그리스도인의 인생길이잖아요? 근데 그런 자유로운 삶에다가 또 교회라는 이름과 권위로 새롭게 만든 이상한 규칙들로 얽어매려는 신율법주의자들도 되지 맙시다요. 하나님도 이스라엘에게 한 번 도전했다가 실패한 게 그 길인데, 예수그리스도가 새롭게 하셔서 완전 다른 길을 가도록 해주셨는데 왜 또 그리로 가려하느냔 말예요.(이게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힘써 부르짖는 이야기잖아요?)
* 율법으로는 단지 죄를 더욱더 깊이 인식할 따름입니다. 죄의 정죄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주신 예수그리스도를 따라 새롭게 난 길,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그가 주도하시고 공급하시는 삶의 리듬을 따라 자유롭게 소풍처럼 사는 인생이 되어봅시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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