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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IVF영성식탁/[시심묵상]하창완목사의 '맑은물소리'

<2020년1월29일(수) 행7:1-60 큐티목소리나눔> “스데반의 설교와 죽임 당함 앞에 이상하게 유대인들과 동질감이...ㅠㅠ ”

<2020년1월29일(수) 행7:1-60 큐티목소리나눔>
“스데반의 설교와 죽임 당함 앞에 이상하게 유대인들과 동질감이...ㅠㅠ ”

1. 스데반의 설교(증언)
* 산헤드린 앞에서 스데반은 기죽지 않고 증언을 합니다.
* 증언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 가나안 땅에 들어오기 전부터, 또 가나안 땅을 벗어나 이집트에 있을 때에도 이 백성과 교제하기를 원했고 그렇게 교제하신 분이시다.
② 하나님은 원래 모세에게 하나님과 교제의 장소로 삼기위해 성막을 지어라고 말씀하셨다. 지금의 성전은 다윗과 솔로몬이 하도 원해서 하나님이 그냥 허락해준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원래 어디 어느 장소에 메여 계신 분이 아니다.
③ 너희는 모세 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과의 교제를 외치던 선지자들을 다 죽인 목이 곧은 백성이다.
* 모인 이스라엘 사람들은 더 이상 듣지 못하고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로마법으로는 금지된 현지인들의 처형을 시행한 것이죠. 그것도 즉결심판으로...

*** 근데, 의문이 드는 건요, 우리가 듣기에 당연한 이 말씀이 당시 이스라엘 재판정에 모인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들렸기에 그들은 스데반을 즉결처형까지 했을까요? 스데반의 설교를 다시 보면요..
* 영광의 하나님으로 출발, 아브라함, (여기서 살짝 요셉의 이야기를 넣음, 나중에 이스라엘의 위치를 요셉이 아닌 형들과 동일시하고자), 모세(하나님이 세우심, 거부당한 구출자 & 율법전달자) ---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없음
* 성전(v35~)으로 넘어가면서 이스라엘을 선민이 아닌 배반자로 몰아가는데...
모세 시대에 금송아지, 가나안 정착 이후 몰록, 레판 등 별의 신들 & 바알, 아세라..., 이제는 성전(하나님은 손을 지은 집에 갖혀 계시는 분이 아닌데..), 그래서 너희는 배역한 조상의 역사를 따라 지금도 의인(예수님을 암시)을 죽였다.(v52)
* 본격적으로 예수의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인데...

*** 다시 보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흥분할 만 했네요.
① 선민의식 자극 : 너희가 선택받은 백성이라고 우기지 말라. 하나님은 어느 누구와도 교제하시기를 원하시는 분이다.
② 성전 중심적 사고에 도전 : 하나님은 성전에 매여계시지 않는다. 따라서 성전을 너무 중요하게 생각하지 말라.
③ 네가 죄인이다 : 바로 너희가 목이 곧고 패역한 백성이다.

2. 누구나 살아오면서 형성된 자기 정체성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기 마련.
* 유대인의 정체성을 만들어온 이야기는 ‘아브라함과 택함(선민), 모세와 출애굽 & 율법, 다윗과 예루살렘 & 성전’ 등으로 펼쳐지는 일련의 구약 이야기입니다.
* 그 이야기 속에서 그들은 자신들만의 상징적 표지(이데올로기)를 끄집어냅니다. : 성전 * 율법 * 예루살렘과 유대를 아우르는 성지 * 개종자 +유대인 가족=민족정체성(선민)
* 스데반은 이 모든 것을 자극하는 사람이었고, 새로운 것을 이야기한 사람이라는 공격을 받았던 거죠. “모세(율법, 민족 정체성, 성지)와 하나님(성전)을 모독했다.”는 분노가 어찌 보면 당연한 겁니다.

*** 이렇게 생각하니까, 갑자기 스대반을 죽인 유대인들이 친근하게까지 느껴지네요...슬프고 비참하게도...ㅠㅠ
* 하나님나라를 이야기하는 복음이 제대로 내 속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실은 이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니까요. 그리고 이 과정에서 우리는 거의 대부분 리버디노회당 사람들처럼 행동하고 있으니까요...ㅠㅠ
* 하나님나라가 뭔지 내 앞에 드러나면, 그가 주도하는 삶의 리듬이 딱 내 앞에 분명하게 드러나면, 그 순간 그 빛 앞에 그동안 나 개인이 살아온 삶의 스토리 속에 녹아있는 나의 정체성과, 동시대 문화 속에 자리하고 있는 우리를 규정하는 잣대들이 화들짝 놀라며 다 드러난단 말이죠.
* 그러면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내 것을 보호하고자 움츠러들게 되죠. 나를 자극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부터 드는 겁니다.
* 예수 믿으면 복 받아요~~. 죽어서 지옥 안가고 천국 가요~~ 예수님은 우리의 위로자~~ 뭐 이런 이야기에는 거부감이 전혀 없어요. 나는 나대로 살면 되니까요. 난 바꿀 이우가 전혀 없고, 단지 그가 날 도와준다는데 뭐 마다할 이유가 없죠.
* 근데, “예수가 삶의 주인이고, 난 그동안 그를 밀쳐내고 내 맘대로 살아온 죄인이라. 이제 회개하고 내 주권을 그에게 내어드려야 한다.”는 것을 제대로 알아들은 사람은, “그럼 난 뭐야? 내 삶은?” 이라는 생각이 든단 말이죠.
* 구체적 예를 들어보면, 그동안 살아오면서 이런저런 이유로 내 속에서 ‘저런 ㅅㄲ가 무슨..’이라고 정죄하고 밀쳐내왔던 사람도 하나님이 만드신 형상이라고, 사랑해야한다고 말씀하실 때, 난 버럭하고 마는 거죠. 게다가 이런 게 사회문화적 옷을 입고 집단화되면 알량한 죄의식마저 사라져 버리거든요. 그게 스데반을 즉결처형하게 만든 배경이기도 하구요. 미국의 백인우월주의자들이 흑인형제를 받아들일 수 없어서 전쟁까지 했고... 뭐 지금 우리나라교회도에서 동성애포비아, 무슬림포비아 등등, 또 사회적으로도 3세계 노동이민자들을 바라보는 시각 등등 수없이 벌어지고 있는 일들입니다.
* 개인적으로 보면, <파인애플스토리>에서 잘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아무리 복음이라도 절대 이 영역은 건들릴 수 없어!”라고 강하게 저항하는 내 속에 있는 뭔가를 우리는 다 하나씩은 갖고 사니까요...
* 그래서 오늘 이야기 속에서 먼저는 리버디노회당 사람들, 나아가 산헤드린에 모여 있는 유대인들,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인 그 사람들 속에서 나와 지금 우리 한국교회를 발견하고 슬프고 비참한 동질감부터 느끼는 겁니다요...ㅠㅠ

**** 자존심, 고집, 분노, 두려움.. 등등 내 속에서 이런 본능적인 감정을 자극하고 저항감이 튀어나오는 순간들... 복음 앞에, 성경 말씀 앞에 진실하게 대면하는 사람은 누구나 만나게 되는 이 순간에 나는 어떻게 하는가?
* 짱돌 들고 자극하는 이를 쳐 죽일 수도 있고, 가만 나를 돌아보며, “아버지, 할 수만 있다면 이건 안 내려놓고 싶습니다..... 하지만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소서.”라고 씨름할 수도 있고... 가롯유다처럼 뛰쳐나갈 수도 있고, 처음엔 당황스러워 거부감부터 드러내었어도 예수님의 진실한 눈과 맞추지는 순간 회개의 울음을 터뜨리고 대성통곡하는 베드로처럼 돌이킬 수도 있고...
* 나만의 은밀하고 깊숙한 내면의 전투현장에서 난 어떻게,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집단적인 파워를 발휘하는 갈등의 지점에서 나와 내가 속한 공동체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주님 앞에서 정직하게 돌아보게 됩니다...

Ps. 오늘은 여기까지, 내일은 스데반과 예수님의 이야기를 같이 묵상해봅시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