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02일(월) 시137편 큐티목소리나눔>
“슬픔은 노래 불러 버리고, 억울함은 하나님 앞에서 욕하면서 버려버리고~~”
1. 바벨론 포로기에 부른 슬픈 노래
* 시편 전체를 통해서 오늘 묵상하는 이 시만큼 애절하고 가슴이 아려오는 건 또 없을 것 같습니다. 시51편이 죄를 자백하고 통회하는 상황이라 애통하긴 하지만, 오늘 이 시는 그런 슬픔과는 차원이 다른, 민족 전체의 아픔이 담겨져 있는 노래입니다.
* 시인은 지금 바벨론으로 잡혀간 포로들 틈에 있습니다. 그들은 바벨론 어느 강변지역에 강제로 정착하게 되었고, 이런저런 노예노동에 시달리거나, 최하층에 속하는 소수민족으로서 갖은 수모와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 이런 때에 그들은 저녁이면 강변 곳곳에 모여앉아 고국을 생각하며 울었습니다. 특별히 찬란했던 예루살렘성전과 자유롭게 드렸던 제사의 찬양이 떠오르면 더더욱 슬픔에 목이 메었습니다. 시온 성가대에서 사용했던 악기는 이제 더 이상 쓸 일이 없어서 나무에다 걸어놓았습니다.
* 이들을 더더욱 슬프게 만드는 건, 매일 부딪히는 사람들이 해대는 조롱입니다. “너희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 있는 거니?” 뭐 이런 조롱은 그래도 참을 만 했는데, 술자리라도 벌어지면 이들을 불러다가 시온성가대에서 불렀던 찬양을 불러보라고 조롱삼아 채근하는 것이었습니다.
2. 마침내 감정이 폭발하고 만 시인
* 시인은 이런 상황을 쭉 묘사하다가 그만 감정이 폭발합니다. 대체 내가 어찌 이 이방 땅에서 주님의 노래를 부를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여기서 찬양대의 노래를 한 소절이라도 읊을 것 같으면 차라리 내 입이 입천장에 말라붙어버리는 게 나을 것이다.
* 내가 어찌 예루살렘을 잊을 수 있단 말인가? 내 너를 잊고 산다면 차라리 내 손이 말라비틀어져버리는 게 나을 것이다.
* 마침내 시인은 북받쳐 오르는 슬픈 분노로 가득 찬 채 하나님을 찾아 기도합니다.
“하나님, 그날, 예루살렘이 무너지던 날 옆에서 기뻐하며 소리치던 에돔 사람들이 떠오릅니다. 그놈들 하나도 살려두시면 안 됩니다. 그리고 이 바벨론 놈들, 이 성도 우리가 당한 그대로 갚아주셔야 됩니다.”
폭발한 시인의 감정은 추스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저주까기도 튀어나오고 맙니다.
“하나님, 여기 이 바벨론 사람들의 어린 자식들을 누가 바위 위에다 메어치는 사람 좀 없습니까? 그런 사람들 있으면 복을 내려주십시오.”
*** 이 시편을 대하면서 옛날 일제 시대를 살았던 우리 조상들이 떠오릅니다. 그때 어른들이 불렀던 노래들, “울 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이런 노래도 불렀고,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설은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뭐 이런 노래도 불렀고...
* 이런 노래들, 그저 슬픔에 젖은 노래도 있지만,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걸어만 간다. ~~~~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명이 지폈나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와 같은, 슬픔 속에서도 뭔가 결기가 빛나는 시도 있었습니다.
* 또 7,80년대 암울했던 군사독재 정권하에서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오직 한 가닥 타는 기억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 이렇게 애타며 불렀던 노래들도 떠오릅니다.
*** 또 지난 세월호 때, 함께 불렀던 노래도 떠오릅니다. “나의 사진 앞에서 울지 마요, 나는 그곳에 없어요. 나는 천개의 바람 되어 자유롭게 날고 있죠. 겨울엔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는 눈이 될게요. 아침엔 종달새 되어 잠든 당신을 깨워 줄께요...”
*** 이렇게 누구나 이런, 저런 슬픔의 현장과 그때 불렀던 노래들이 있기 마련인데요... 그 노래들을 떠올리면 그 아팠던 시절의 이야기들이 고스란히 떠오르고... 그렇게 눈물 한줌 흘리고 나면 어느새 또 그 슬픔은 가라앉고 새 힘이 나고....
* 이게 노래가 주는 힘인 것 같아요. 지금 시인은 그렇게 노래를 통해, 시를 통해 슬픔을 털어내고 있는 거구요...
*** 한편, 떠오르는 수많은 기억들 중에 특히 이 모든 슬픔을 고스란히 안고서 하나님을 절규하며 불렀던 기억들, 누구 말대로 밤새 나무뿌리 풀뿌리 붙잡아 당기며 “주여! 주여!”를 외치며 통곡했던 기억들이 있습니다.
* 그때 내가 쏟아냈던 말들, 어떤 땐 슬픔이 극에 달해 뱉어낸 말들, 또 어떤 땐 억울한 마음을 도저히 어쩔 수 없어서 쏟아낸 상대에 대한 저주들... 이런 게 고스란히 하나님 앞으로 올라간 기도가 되었던 때들이 떠오릅니다.
* 하긴, 어떤 땐 마음은 억울해서 미치고 팔짝 뛰고 뒤집어지는데 감히 하나님 앞이라 아무 말이나 쏟아놓을 수 없어서 더 답답했던 기억도 떠오르네요...ㅠㅠ
*** 그러면서요.., 오늘 시편에서 제일 마음에 오 닿는 구절이 하나 있는데요... 맨 마지막 구절이네요.. “네가 우리에게 입힌 해를 그대로 되갚아 주는 사람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 네 어린 아이들을 바위에다가 메어치는 사람들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 허걱....
* 내가 감히 하나님 앞이라 말하지 못했던 말을, 이 시인은 겁도 없이 그냥 마구 내뱉고 있네요... 이래도 되는 건지...
* 근데, 이게 시편이잖아요? 누군가의 노래요 기도이자,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이 받아주신 내용이란 말씀!!!
* 와우~~ 하나님 앞에 이렇게 자유롭게 내 마음, 내 감정, 내 하고 싶은 말을 다 해도 그걸 받아주셔서 시편에 딱 기록까지 해주신 걸 보니까 뭔가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습니다요~~^^
* 슬픔이 극에 달할 때, 또 그게 전 민족적 슬픔이 될 때, 주님을 부르며 목 놓아 통곡할 수 있는 게 어딘가요? 또 그러다 막 튀어나오는 소리를 “시끄럽다. 고마해라”라고 물리치지 않으시고 모든 천상의 소리들을 다 조용히 시키기까지 하시면서 귀 기울여 들어주시는 우리 하나님이 계시니까, 그게 그래도 이 슬픔과 눈물, 억울함이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거죠...
* 이렇게 억울해서 답답해서 슬퍼서 쏟아내는 아무 말도 다 들어주시는 우리 하나님이 계시니까 말예요...
* 암튼 슬픔은 노래 불러 털어버리고, 억울함은 아무도 보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 욕해서 버려버리고, 기쁨과 즐거움으로 다시 우뚝 일어서는 회복 탄력성을 갖고 사는 거, 요게 우리 하나님이 계셔서 더욱 쉽고, 더욱 빠르게 될 수 있음이 참 좋습니다요~~^^
부산IVF영성식탁/[시심묵상]하창완목사의 '맑은물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