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3월21일(수) 눅10:25-37 큐티목소리나눔>
“가서 이웃으로 사는 것부터 좀 해봐! 외계인으로 살지 말고...”
1. 한 율법학자의 질문
* 한 율법학자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시험하고자하였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아마 공개적인 자리였겠죠? 그래야 예수님의 이단성을 분별하고 심지어 폭로할 수 있을 테니까요..
* “랍비님, 제가 뭘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유대랍비들의 통상적 질문. ‘영생’은 하나님이 다시 오셔서 완성하실 하나님나라, 이스라엘이 모두 기다리는 오는 세대. 여기에 대한 모범답안은 율법학자들 사이에는 이미 정리가 되어있었음. 예수님도 두어 번 정리해서 들려준 적이 있음(막12:29-31; 마22:37-40)
* 예수님은 질문으로 답을 하심. “넌 어찌 생각하누?” 이어지는 율법학자의 모범답안 “하나님사랑, 이웃 사랑”
* 옳거니. 그럼 그대로 살면 되겠네..
* 율법학자의 질문 이탄. “그럼 누가 나의 이웃인가요?” 이건 꼼짝 못할걸? 왜냐면 이스라엘에겐 당연히 유대인만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었으니, 이웃의 범주도 그 속에서 결정되어야 하고, 또 이런저런 이유로 율법에 저촉되는 사람들(죄인들, 세리들, 시체를 만지거나 해서 부정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 등등)은 제외시켜야 할 거고... 하지만 이 사람 예수가 지금까지 해온 바에 따르면 이 부분에서 금기를 많이 어겼단 말이쥐. 이 질문엔 너도 당할 수밖에 없을 걸~~ㅎㅎ
2. 비유 속으로~~ (율법을 뛰어넘는 이야기)
* 예루살렘(유대 산꼭대기)~여리고(요단 강변의 평지)는 좁고 가파른 경사지를 따라 구불구불한 길이 이어집니다. 곳곳에 음침한 곳이 있어서 강도들이 출몰하기 쉬운 곳이죠.. 따라서 사람들은 무리를 지어 다니는데, 혼자 가다가는 당하기 마련...
* 유대인이 강도를 만나 쓰러져 죽어가고 있는 상황(멀리서 보면 죽은 시체이지 아닌지 분간이 안 됨).
* 제사장, 레위인 : 시체를 만지면 부정해지니까 그냥 지나감
* 한 사마리아인 : 사마리아인? 이스라엘사람들은 사람취급도 안하는 존재들이잖아? 이스라엘의 순혈주의를 버린 사람들... 근데 그가 가다가 이 사람을 발견하고 나귀에 태워서 주막에 델꼬 가서 블라블라~~
* 이 유대인에게는 누가 이웃일까욤? 당근 도와준 사람이쥐! 근데 그가 사마리아인이라고? 글쎄 이 상황에서 그가 누구든 그게 뭐가 중요하지? 지금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실제로 도와준 사람이 그의 이웃이 아닐까?
* 네가 절실히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서 널 도와준 사람이 네 이웃이듯.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거든 달려가 도와주면 그에게 너는 이웃이 되는 거잖아?
*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를 실천하고 싶다고? 아니, 실천하고 있다고? 그럼 진짜 네 옆에 도움이 절실한 사람이 누구든 그를 도와주고 살고 있는 거야? 아니면, 이런 잣대, 저런 기준을 들이대며 제칠 것을 제치고, 취사선택해서, 고르고 골라서 도와주는 거야?
3. 이웃으로 살아가는 것을 막는 종교적인 장치들.
* 유대인들이 스스로 만든 순혈주의와 율법해석과 규칙들은 스스로를 외부 오염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한 목적이 강하죠. “~~말라. ~~말라.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돼!!!
* 하지만, 율법의 핵심이 “사랑하라!”일진대, 적극적으로 다가가서 사랑을 표현하길 하나님은 원하신단 말이죠. 스스로를 외부 오염으로부터 지키려고 싸매고 있는데 어떻게 다가갈 수 있냐구요. 똥 묻을 것이 걱정되면 똥을 치우러 들어갈 수가 없잖아요?
* 아니, 더 나아가, 성결이라는 게, 외부 오염원을 피해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잖아요? 내 마음의 중심에서 이기심을 버리고, 내가 세상의 주인이라는 걸 버릴 때 깨끗해지는 것이잖아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이심을 진심 인정하고, 그 마음으로 이웃을 바라보는 가운데 성결이 이루어지는 거잖아요? 오염원이 바로 내 안에 있는 이기심, 나 중심성인데 말예요..
*** 오늘날 보수 기독교 전반에 퍼져 있는 각종 포비아적 발상과 행동들은 이런 점에서 예수님을 찾아온 율법학자의 태도, 행동과 꼭 같다고 할 수 있다는...ㅠㅠ
* 동성애자가 없어져야만 기독교적 성결이 유지가 되나요? 아님 내 이웃에 사는 그에게 찾아가 밥이라도 한 끼 먹고 친구로 살아가는 게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성결인가요? 그와 밥 먹는다고 내 믿음이 무너지기라도 하는 건가요?
* 무슬림이 쳐들어 온다구요? 오면 따뜻하게 맞이하고 밥이라도 한 끼 같이 먹고, 먼 곳에 와서 고생한다고 따독따독 해주면 안 되나요? 곳곳에 회교사원을 짓고 포교를 하기 때문에 기독교가 위험해진다구요? 기독교는 로마 치하 카타콤에서도, 공산국가에서도 살아남았고, 전도를 했는데, 무슬림이 전도한고 망할까요? 또 우리는 불교국가에 가면 교회당 안 짓나요? 그를 존중하면 그의 종교도 존중해줘야죠. 그럼 전도는 언제 하냐구요? 그다음 차근차근 하면 되죠. 만날 기회조차 안 만들고 막아서면 전도할 기회조차도 안 생기는 걸요?
* 술 마시는 사람, 담배 피는 사람은 교회에 출석하면 안 되나요? 예배를 같이 드릴 수 없는 걸까요? 왜 우리 안에는 근원적인 거부감이 자리할까요? 왜 우리 안에는 너보다는 내가 한 수 위인 것 같은 우월감이 가득한 걸까요?
* 내 이웃의 필요에 그냥 다가가서 함께하는 사랑을 실천하기는 고사하고, 어떤 부류의 사람들을 이웃으로 취급조차 하지 않으려 할까요?
*** 오늘은 말씀을 나누다 보니, 정말 화가 많이 나네요...ㅠㅠ 우리 한국교회의 현실, 이른바 기독교인들이 살아가고 있는 모습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는지....ㅠㅠ
*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둘째 치고 그냥 이웃으로 사는 것부터 배워야 할 것 같다는...지금처럼 외계인으로 사는 게 아니라...
*... 화를 좀 가라앉히고 가만 돌아보니, 문득 내 속에 숨겨진 은밀한 우월감들이 떠올라 흠칫 놀라게 됩니다.... ㅠㅠ
* 너와 나 사이를 무의식적으로 자로 재고 계산해서 ‘너보다는 내가~’라는 판단을 하는 게 아니라, 그냥 그에게 집중하여 듣고 보고, 놀라운 일이 있으면 경탄하고 칭찬하고 기뻐하고, 그에게 뭔가 아픔이 있거든 자연스럽게 같이 눈물 흘리고, 내 주머니 열어서 그냥 손에 쥐어주는 자연스러움이... 그게 바로 하나님 사랑에 겨워 사는 사람의 마음 아닐까요?
* 바로 내가 받은 사랑이 너무 많아서, 하나님이 내게 부어주신 사랑에 겨워서, 너와 나의 거리를 재지 않고 그냥 손을 덥석 잡을 수 있는 그런 자연스러움이 가득하길, 그런 진짜 사랑을 하는 사람이 되길 기도합니다.
http://podbbang.com/ch/8784?e=22561624
“가서 이웃으로 사는 것부터 좀 해봐! 외계인으로 살지 말고...”
1. 한 율법학자의 질문
* 한 율법학자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시험하고자하였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아마 공개적인 자리였겠죠? 그래야 예수님의 이단성을 분별하고 심지어 폭로할 수 있을 테니까요..
* “랍비님, 제가 뭘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유대랍비들의 통상적 질문. ‘영생’은 하나님이 다시 오셔서 완성하실 하나님나라, 이스라엘이 모두 기다리는 오는 세대. 여기에 대한 모범답안은 율법학자들 사이에는 이미 정리가 되어있었음. 예수님도 두어 번 정리해서 들려준 적이 있음(막12:29-31; 마22:37-40)
* 예수님은 질문으로 답을 하심. “넌 어찌 생각하누?” 이어지는 율법학자의 모범답안 “하나님사랑, 이웃 사랑”
* 옳거니. 그럼 그대로 살면 되겠네..
* 율법학자의 질문 이탄. “그럼 누가 나의 이웃인가요?” 이건 꼼짝 못할걸? 왜냐면 이스라엘에겐 당연히 유대인만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었으니, 이웃의 범주도 그 속에서 결정되어야 하고, 또 이런저런 이유로 율법에 저촉되는 사람들(죄인들, 세리들, 시체를 만지거나 해서 부정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 등등)은 제외시켜야 할 거고... 하지만 이 사람 예수가 지금까지 해온 바에 따르면 이 부분에서 금기를 많이 어겼단 말이쥐. 이 질문엔 너도 당할 수밖에 없을 걸~~ㅎㅎ
2. 비유 속으로~~ (율법을 뛰어넘는 이야기)
* 예루살렘(유대 산꼭대기)~여리고(요단 강변의 평지)는 좁고 가파른 경사지를 따라 구불구불한 길이 이어집니다. 곳곳에 음침한 곳이 있어서 강도들이 출몰하기 쉬운 곳이죠.. 따라서 사람들은 무리를 지어 다니는데, 혼자 가다가는 당하기 마련...
* 유대인이 강도를 만나 쓰러져 죽어가고 있는 상황(멀리서 보면 죽은 시체이지 아닌지 분간이 안 됨).
* 제사장, 레위인 : 시체를 만지면 부정해지니까 그냥 지나감
* 한 사마리아인 : 사마리아인? 이스라엘사람들은 사람취급도 안하는 존재들이잖아? 이스라엘의 순혈주의를 버린 사람들... 근데 그가 가다가 이 사람을 발견하고 나귀에 태워서 주막에 델꼬 가서 블라블라~~
* 이 유대인에게는 누가 이웃일까욤? 당근 도와준 사람이쥐! 근데 그가 사마리아인이라고? 글쎄 이 상황에서 그가 누구든 그게 뭐가 중요하지? 지금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실제로 도와준 사람이 그의 이웃이 아닐까?
* 네가 절실히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서 널 도와준 사람이 네 이웃이듯.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거든 달려가 도와주면 그에게 너는 이웃이 되는 거잖아?
*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를 실천하고 싶다고? 아니, 실천하고 있다고? 그럼 진짜 네 옆에 도움이 절실한 사람이 누구든 그를 도와주고 살고 있는 거야? 아니면, 이런 잣대, 저런 기준을 들이대며 제칠 것을 제치고, 취사선택해서, 고르고 골라서 도와주는 거야?
3. 이웃으로 살아가는 것을 막는 종교적인 장치들.
* 유대인들이 스스로 만든 순혈주의와 율법해석과 규칙들은 스스로를 외부 오염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한 목적이 강하죠. “~~말라. ~~말라.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돼!!!
* 하지만, 율법의 핵심이 “사랑하라!”일진대, 적극적으로 다가가서 사랑을 표현하길 하나님은 원하신단 말이죠. 스스로를 외부 오염으로부터 지키려고 싸매고 있는데 어떻게 다가갈 수 있냐구요. 똥 묻을 것이 걱정되면 똥을 치우러 들어갈 수가 없잖아요?
* 아니, 더 나아가, 성결이라는 게, 외부 오염원을 피해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잖아요? 내 마음의 중심에서 이기심을 버리고, 내가 세상의 주인이라는 걸 버릴 때 깨끗해지는 것이잖아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이심을 진심 인정하고, 그 마음으로 이웃을 바라보는 가운데 성결이 이루어지는 거잖아요? 오염원이 바로 내 안에 있는 이기심, 나 중심성인데 말예요..
*** 오늘날 보수 기독교 전반에 퍼져 있는 각종 포비아적 발상과 행동들은 이런 점에서 예수님을 찾아온 율법학자의 태도, 행동과 꼭 같다고 할 수 있다는...ㅠㅠ
* 동성애자가 없어져야만 기독교적 성결이 유지가 되나요? 아님 내 이웃에 사는 그에게 찾아가 밥이라도 한 끼 먹고 친구로 살아가는 게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성결인가요? 그와 밥 먹는다고 내 믿음이 무너지기라도 하는 건가요?
* 무슬림이 쳐들어 온다구요? 오면 따뜻하게 맞이하고 밥이라도 한 끼 같이 먹고, 먼 곳에 와서 고생한다고 따독따독 해주면 안 되나요? 곳곳에 회교사원을 짓고 포교를 하기 때문에 기독교가 위험해진다구요? 기독교는 로마 치하 카타콤에서도, 공산국가에서도 살아남았고, 전도를 했는데, 무슬림이 전도한고 망할까요? 또 우리는 불교국가에 가면 교회당 안 짓나요? 그를 존중하면 그의 종교도 존중해줘야죠. 그럼 전도는 언제 하냐구요? 그다음 차근차근 하면 되죠. 만날 기회조차 안 만들고 막아서면 전도할 기회조차도 안 생기는 걸요?
* 술 마시는 사람, 담배 피는 사람은 교회에 출석하면 안 되나요? 예배를 같이 드릴 수 없는 걸까요? 왜 우리 안에는 근원적인 거부감이 자리할까요? 왜 우리 안에는 너보다는 내가 한 수 위인 것 같은 우월감이 가득한 걸까요?
* 내 이웃의 필요에 그냥 다가가서 함께하는 사랑을 실천하기는 고사하고, 어떤 부류의 사람들을 이웃으로 취급조차 하지 않으려 할까요?
*** 오늘은 말씀을 나누다 보니, 정말 화가 많이 나네요...ㅠㅠ 우리 한국교회의 현실, 이른바 기독교인들이 살아가고 있는 모습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는지....ㅠㅠ
*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둘째 치고 그냥 이웃으로 사는 것부터 배워야 할 것 같다는...지금처럼 외계인으로 사는 게 아니라...
*... 화를 좀 가라앉히고 가만 돌아보니, 문득 내 속에 숨겨진 은밀한 우월감들이 떠올라 흠칫 놀라게 됩니다.... ㅠㅠ
* 너와 나 사이를 무의식적으로 자로 재고 계산해서 ‘너보다는 내가~’라는 판단을 하는 게 아니라, 그냥 그에게 집중하여 듣고 보고, 놀라운 일이 있으면 경탄하고 칭찬하고 기뻐하고, 그에게 뭔가 아픔이 있거든 자연스럽게 같이 눈물 흘리고, 내 주머니 열어서 그냥 손에 쥐어주는 자연스러움이... 그게 바로 하나님 사랑에 겨워 사는 사람의 마음 아닐까요?
* 바로 내가 받은 사랑이 너무 많아서, 하나님이 내게 부어주신 사랑에 겨워서, 너와 나의 거리를 재지 않고 그냥 손을 덥석 잡을 수 있는 그런 자연스러움이 가득하길, 그런 진짜 사랑을 하는 사람이 되길 기도합니다.
http://podbbang.com/ch/8784?e=2256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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